20211005 서양현대철학사 ⚠️

⚠️ 정리중인 포스트입니다

쇼펜하우어와 예술과 해방

쇼펜하우어에 있어서 예술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예술이라는 것은 의지와 관련해서, 우리는 의지의 노예인데, 우리를 의지로부터 잠시 해방시켜 준다 .영원한 해방이 아니라, 일시적인 해방이다.

예술은 미적 관조의 대상이다. 아룸다움을 관조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의 능력, 이성에 의존한는것이다. 이성이 아름다움을 관조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럼 이성의 무엇이 그렇게 해 주는가? 아름다움에 대한 이성의 관심이 그렇게 해 준다. 그래서 우리는 관심의 관점에서 이성을 바라보도록 하자.

이것은 고대 이래의 관심에 따라서 이성을 살피는 것은 근대에도 특유한 것이다. 칸트에서 나타난다. 칸트의 3비판서는 이성의 관심에 따라서 분류하고 씌여졌다. 사변적 관심, 이성의 이론적 관심을 살피고 있는 책이 순수이성비판이고, 이성의 실천적 관심을 살피는 것이 실천이성비판이다. 판단력 비판은 미를 관조하는 이성의 능력에 기반한 책이다. 미에 관련된 관심은 관심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미적 관조는 어디서 가능한가? 이론 철학은 이성의 사변적 관심, 이론적 관심, 실천철학은 이성의 실천적 관심, 그러나 이 미와 관련해서는 관심보다는 무관심성을 이야기해야 한다. 어떤 점에서 우리는 무관심이 미적 관조를 가능하게 해 주는가?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고 하자. 이론적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 이성의 이론적 관점에서 볼 때, 밤하늘의 천체라는 것은 이론적 인식의 대상이다. 이렇게 이론적인 관심을 가졌을 때, 그것이 아름답다거나 그런 것을 느낄 사이가 없다. 폭풍우치는 바다를 본다고 하자. 터너같은 영국 화가의 작품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소재이다. 실천적 과점에서 보자면, 난파선을 바라보거나 타고 있다면, 실천적 관심에서는 사람을 구하거나 자기 생명을 유지해서 무엇이건 실천하는 행위가 가장 우선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실천 정신에 기반한다. 여기에서 난파선을 타고 있는 사람, 혹은 난파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난파선이 지나는 바다는 아름답다는 것을 느낄 사이가 없다. 오로지 이런 모든 실천적인 맥락에서 떠났을 때, 무관심 해졌을 때, 터너의 그림을 보면서 미적인 즐거움을 느끼는 것과 같이, 그렇게 폭풍우 치는 바다, 난파선이 떠돌아 다니는 바다에 대해서 장엄한 미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두 가지 예, 밤하늘과 폭풍우치는 바다를 보면서 우리는 미는 일성의 이론적 관심, 실천적 관심을 떠났을 때, 무관심하게 되었을때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미적 관조라는 것이, 또는 미적 관조를 가능하게 해 주는 예술이라는 것이 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지도 알 수 있다. 바로 의지의 노예가 되는 것은 우리의 실천적인 성향의 노예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인가 실질적으로 계속 욕구하는 것이다. 미적 관조라는 것은 이런 실천적 관심, 욕구로부터 무관심해지는 데서 성립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미적 관조 속에서 실천적 관심 또는 의지의 강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예술이라는 것은 의지로부터 우리를 벗어날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러나 삶 자체가 예술 자체와 동일한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는 일시적으로만 예술을 통해서 이 의지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이지, 항구적인 해방을 이룰 수는 없다.

이제 이런 기본적인 예술에 쇼펜하우어가 부여하는 의의에 이어서, 예술과 관련된 세부적인 측면들을 살펴보자.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예술과 관련되어서 중요한 두 가지 장르가 있다면, 비극과 음악이다.

비극

비극을 쇼펜하우어는 최고의 시적 예술이라고 일컫는다. 우리의 가장 근본적이니 것, 본체적인 것이 의지라는 것이 비극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비극에 주요하게 출연하는 요소들은 선한 자가 파멸하고 악이 승리하는 것, 비탄하는 사람들, 자신의 비극적인 국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 이런 것은 모두 의지가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비극의 원인이 되는 것은 과도한 정념, 탐내서는 안 되는 것을 탐내는 것들이다. 이것은 곧 우리 삶이 의지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비극은 의지를 그 모습 자체로 드러낸다. 그런 비극을 감상하는 자, 비극과 대면하고 있는 자는 의지의 지배를 받지 않은 채, 의지 자체를 비극 속에서 응시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의지 자체를 우리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비극이다. 이런 의미에서, 쇼펜하우어는 비극을 최고의 시적 예술이라고 평가한다. 의지를 그 자체로 드러내주고, 우리에게 의지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음악

시적 예술 가운데 최고의 것이 비극이라면, 모든 예술 가운데 최고의 것은 음악이다. 음악은 의지를 직접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의지를 가장 매개 없이 잘 드러내 준다. 음악 속에서 의지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우리가 음악이 아닌, 언어를 통해서 의지를 드러내고자 한다면, 우리는 특정한 표상의 방식, 즐겁다라거나 슬프다라거나 이런 방식을 매개로 해야 한다. 그러나 즐거울 때 콧노래가 나오고, 슬플 때 흐느껴 우는 것처럼, 그런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들이 음악이라고 했을 때, 음악은 직접적으로 의지를 표현해준다고 말할 수가 있다.

바로 이렇게 이런 예술과 관련되서 평가되는 2가지, 비극과 음악이라는 것은 당대 예술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쇼펜하우어와 관련해서, 쇼펜하우어의 예술론에도 영향을 받았고, 쇼펜하우어적 관점에서 평가해볼 수 있는 예술가가 바그너이다. 비극과 음악, 두 가지를 모두 한꺼번에 구현하고 있는 것이 트리스탄과 이졸데같은 그런 극이라고 할 수 있따. 그에 대해서는 조금 더 이야기해볼 수 있다. 예술의 가치를 예술가에게 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쇼펜하우어가 생각하는 예술의 이상, 비극과 음악 등등을 예술가 스스로가 구현해 보려고 했던 것이 쇼펜하우어가 당대에 미친 영향이었다.

궁극적으로 의지로부터 해방

그렇다면 이 의지로부터의 우리를 노예 상태로 만드는 의지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가? 궁극적으로 의지로부터 우리는 해방될 수 있을까?이것이 쇼펜하우어가 의지의 표상으로써의 세계의 결론으로써 살피고 있는 주체이다. 의지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의지의 부정이다. 의지로부터 벗어나는 일을 어떻게 가능할까? 여기에는 근본적인 난점이 있다. 쇼펜하우어가 충분히 해명했을 지는 의심스럽다. 근본적인 난점이란, 의지로부터 벗어나려는 그런 시도는 그 자체로 의지에 예속될 가능성이 있다. 의지로부터 벗어나려는 것 역시 의지의 소산이니까. 무를 욕구하는 것이 의지가 완전히 없는 그런 무를 욕구하는 것이 의지를 추동력으로 삼는 것이라면, 여전히 그것은 의지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자살 역시 평가할 수 있따. 자살을 통해서 생을 중단시키는 것, 이런 것은 쇼펜하우에게 있어서는 의지를 부정하는 길로 고려되지 않는다. 이것은 의지를 폐기하는 일이 아니라 의지를 발현하는 일이다. 이것은 어떤 점에서 자기가 가지려고 하지만 의지를 통해서 발현하고자 하지만, 결코 갖지 못하기 때문에 노예의 상태에 빠지고 괴로워하는 이 상태를 왜곡적으로 다르게 표현한 것이 자살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욕구를 다른 방식으로 실현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의지로부터 벗어나는 것 역시 의지의 소산이라면, 완전한 해방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는 의지를 가지고, 의지의 포기와 관련하여 쇼펜하우어가 구제적으로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는지 살펴보자.

그 전에,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라는 작품에 대해 알아보자. 창작 당시, 쇼펜하우어에 깊이 심취해 있기도 하였기 때문에, 노골적으로 의지와 표상으로써의 세계의 관점이 투영되어 있다. 거기에서 사랑에 빠진 두 주인공이라는 것은 쇼펜하우어가 묘사하는 그야말로 의지의 노예 상태가 되어서 괴로워하는 자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들 자체가 이들의 운명, 의지에 휘둘리는 그들의 운명 그 자체를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대단히 쇼펜하우어적인 작품이라고 평가를 해도 좋다. 그 뿐 아니라, 여기에 의지로부터의 해방, 의지로부터의 해방을 갈망하는 모습 역시 담겨져 있다.가령 2막에서 진행되는 사랑의 이중창의 끝부분은 이렇게 진행된다. 죽음에 대한 희구로 끝나게 된다. 이것은 정념을 통해서 의지를 극도로 발현하고 있는 주인공들이 궁극적으로 그 종국은 행복이나 의지의 충족이 아니라, 바로 부의 상태를 통해서만 의지의 모든 문제는 모든 수수께끼는 해결될 수 있다라는 것, 그것을 암암리에 표현하는 것이 그 가사이다. 의지의 종국에 충족과 행복이 아니라 죽음, 무가 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가사이다. 그런 생각, 바로 의지라는 것은 의지의 충족이 아니라 무가 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라는 것은 쇼펜하우어 자신이 일종의 의지로부터의 해방과 관련해서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방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의지의 표상으로써의 세계에서 몇 구절.

"참된 행복, 즉 삶과 고뇌로부터의 구원은 의지의 완전한 부정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거기에 도달하기까지는, 모든 다름 아닌 이 의지의 자체에 불과하고, 이 의지의 현상은 덧없는 존재이자 언제나 헛되고 끊임없이 좌절된 노력이며, 우리가 묘사한 고뇌에 가득찬 세계이다."

삶과 고뇌부터의 해방이라는 것은 의지 그 자체의 표현이고, 그 도정은 고뇌이다. 그렇다면 그 과정을 거쳐서 궁극적으로 무의 상태, 의지가 없다라는 점에서 무에 도달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쇼펜하우어는 플라톤의 소피스테스 편에 입각해서 이 문제를 다룬다. 플라톤의 소피스테스 편 자체가 무의 문제, 비존재를 다루는 텍스트이다. 플라톤적인 접근을 통해서 의지의 무화, 의지의 무에 접근하고 있다. 자기가 연구한 바와 관련해서, 플라톤을 이렇게 평가한다. "플라톤이 그의 저서 소피스테스 편에서 행한 무에 대한 까다로운 변증법적 연구 결과도 이와 일치한다." 소피스테스 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우리는 다른 존재의 본성이 존재하고, 모든 존재자 상호간의 관계에 비치고 있음을 증명하고, 이 본성의 모든 개별적인 부분을 그 존재자에 대립시키면서 이 다른 존재는 실제로는 비존재자임을 감히 주장하려고 했다."

간단히 이야기하자. 비존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존재에 대해서 모든 것을 대립시키고, 비존재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A의 대립은 not A이다. 이 not A라는 것은 A가 가지고 있는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것이지, 무가 아니다. 소피스테스편의 중요한 결론은 비존재는 전적인 무가 아니라, 실존의 한 양식이라는 것이다. 소피스테스 편의 목적은 소피스트들에 대한 비난을 가능하게 하는 길을 여는 것이다. 소피스트는 참된 철학자가 아니고, 철학자의 이데아를 분유받은 자가 아니고, 그럼 그들은 무인가? 무에 대해서 어떻게 언급하겠는가? 파르메니데스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무는 사유와 언급의 대상이 아닌데. 바로 이것은 존재함의 다름이라는 것, 그래서 이데아를 따르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소피스테스들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요약하자면, 비존재는 실존의 한 양식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전제로 해서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무엇보다 먼저 무의 개념이 본질적으로 상대적이고, 언제나 그 개념이 부정하는 특정한 무엇에만 관계한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는 반대의 관점에서 보면 +가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