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07 서양현대철학사
포스트 : 2023.08.01.
최근 수정 : 2023.08.01.
물질적 기반/경제적
정신보다, 이성보다 앞선, 마음의 활동보다 앞서는 물질적 기반이 무언인가에 대해서 알아보자.
"갈증을 풀기 위해 어떤 사람이 냇물을 마신다고 해 보자. 이는 의식과 자연이 맺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행위는 많은 동물들도 하는 행위이다. 노동은 인간이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자연적 대상을 의식적으로 변용시킬 때, 그리고 인간이 도구를 수단으로 사용할 때 명확히 인간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노동의 근본적인 형태와 인간과 자연의 근본적 관계는 생산 활동,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한 수단의 의식적 생산이다. 원래 인간은 경제적 인간인 것이다"
물질적 기반이란 경제적으로 조건지어진 인간의 삶이다. 유물론이라고 했을 때, 경제적으로 조건지어진 인간의 삶이다. 경제적이란, 의식적으로 생산을 한다는 것이다. 생산은 당연히 노동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러므로 의식적으로 노동을 통해서 생산하는 방식으로 자연과 인간이 마주하는 것이 경제적 인간이라는 것의 의미이고, 물질적 기반의 의미이다.
갈증을 풀기 위해서 인간도 샘물에 가서 물을 마신다. 인간은 그것이 자기 의식에 매개되는 활동이다. 의식에 매개되는 활동을 통해서 조금 더 복잡하게 이야기해보자. 샘물을 더 잘 마시기 위해서 그릇을 쓸 수 있다. 이는 모두 생산을 위해서, 샘물을 인간에게 유용한 것으로 생산하기 위해서 도입되는 도구들이다. 도구를 사용해서 생산하는 것이다. 이것이 동물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의 차이점이며, 인간의 행위를 동물의 행위와 구분해서 경제적 활동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생산한다, 생산을 위해 도구를 도입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의식적으로 노동을 통해서 생산하는 방식으로 자연과 대면하는 것을 가리켜 경제 활동이라고 하고, 마르크스가 이야기하는 물질적 기반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런 기본적인 것을 바탕에 두고서, 보자.
이게 바로 노동하는 인간을 바탕으로, 근본적인 개념은 물질적 생산력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물질적 생산력이라는 것은 인간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각종 도구를 도입해서 생산하는 능력, 활동을 이컫는 것이다. 물질적 생산력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한 사람의 인간에게 고립되어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력이란 언제든지 생산 관계에서만,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생산 관계라는 것은 한 마디로, 노동 과정에 포함되고 있는 것으로써의 인간 사이의 사회적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 생산 관계 속에서만 생산력은 존립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생산력, 생산 관계라는 것은 생산력과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생상력에 대응하는 특정한 생산 관계가 있다. 어떤 생산 관계가 어떤 생산력이 생산 관계와 불화할 때, 어떤 생산 관계가어떤 생산력을 수용하지 못할 때, 다르게 말해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인간의 노동력과 모순될 때, 인간의 노동력을 수용하지 못하는 사회적 관계일 때, 바로 갈등이 일어나고, 혁명이 일어나서 노동력을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생산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바로 이렇게 생산력가 생산 관계 사이의 모순 때문에 생산 관계가 와해되고 새로운 생산 관계로 들어가는 과정을 역사 속에서 보여준 게 마르크스의 역사 법칙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생산력과 생산 관계가 무엇을 이루는가? 하부구조를 이룬다.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제약한다. 상부구조는 바로 사회적 정치적 정치적 삶 일반이다. 철학이건 종교건 이 모두는 독자적으로 근본적인 가치를 지니거나 그 자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구조에 수반하는 이데올로지적인 것이다. 우리는 같은 맥락에서 생산력과 생산 관계에 따라서 2차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바로 상부 구조, 정신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인간의 의식이 그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인간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즉, 경제적으로 조건 지어진 물질적 기반이 정신적인 내용들, 가치들을 규정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생산력의 변화에 따라서 생산 관계가 와해되고 새로 출현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이 원시공산제, 노예제, 중세봉건제, 자본주의, 공신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이다. 가령 노예제를 출현시키게 된 그런 생산력의 근본적인 변동이란 무엇인가? 새로운 사회 관계, 새로운 생산 관계로 이행하도록 해 준 추동력이란 철의 발견, 철의 대량 생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것을 생산하기 위해서 노예가 필요하게 되고, 생산된 철을 독점하면서 부유한 사람들이 생기게 되고, 이런 방식의 새로운 계급이 생기게 된다. 그런 식으로 생산력에 따라서 자본주의 등등으로의 이행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 부르주아 사회에서 이런 생산력이 변동된, 또는 새로운 생산 관계를 초래하게 하는 생산력의 변동이란 무엇일까? 또는 근본적인 생산력의 요소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에서, "모든 생산력 중에서 최고의 ?것은 혁명적 계급 자신이다." 이 혁명적 계급으로써의 노동자가 기존의 경제 체제와 충돌하고, 그래서 혁명이 야기되고, 새로운 생산관계가 들어서게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생산력 중에서 노동자, 혁명자 계급 자체가 생산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는가? 소외라던가 이런 주제를 통해서 밝혀지게 된다. 노동의 주체, 생산의 주체이지만 그 근본적인 과정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그런 노동자가 자기 의식을 통해서 스스 생산하는 주체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혁명적 계급으로써의 위치를 가질 수 있게 된다.이렇게 물적 기반, 경제적으로 조건지어진 삶에 따라서 계속 사회체가 역사가 변모되는 것이 바로 변증법적 유물론의 내용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와 관련되어서 핵심적인 것이다.
앵겔스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하자. 마르크스주의에서 엥겔스의 독자적인 면모를 이야기한다면, 그것을 자연변증법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가령, 사회적으로 조건지어진 물질적인 기반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조건지어진 삶이 아니라, 자연 자체 안에서 물질의 과정 자체 안에서 물질의 과정 자체가 변증법적이라는 것이 자연 변증법의 내용이다. 예를 들어서, 보리는 싹을 맺고 자라나기 시작할 때,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고 그 부정의 결과는 많은 종자가 나오는 것이고, 이런 방식이 바로 변증법적, 부정의 부정을 통해서 전개되는 변증법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보리가 스스로를 부정해서 싹을 내고, 여러 종자로 펼쳐지는 것. 그리서 열 배 스무 배의 보리를 내는 것. 그리고 애벌레는 알을 부정하는 방식이다. 그런 방식으로 부정의 부정의 과정을 통해서 자연법적 변증론이 전개가 된다는 것이다. 자연을 물질적 기반이라는 것을 경제적으로 조건지어진 삶에 한정짓지 않고, 자연 자체의 물질적 과정으로 이야기할 때, 이는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자연 철학으로 보이기도 한다.
나중에 이러한 마르크스주의라는 것은 자기 의식의 발전 과정, 인간이 자기 의식을 통해서 소외를 극복하게 되는 것에 중점을 둘 때,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로 읽힐 수 있다. 그런 면모는 나중에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학자들로부터 볼 수 있다. 또한 이것을 객관적인 요소의 의미에서 구조상의 객관적인 요소에 의해서 사회 변동을 설명하려고 할 때, 이것은 인간주의적인 것이기보다 과학주의적인 면모를 띄고, 그것은 나중에 구조주의적으로 마르크스주의에 접근할 때 더 부각되는 것이기도 하다.
생철학
이제 실존주의의 선구적인 철학이라고 일컬어지도기도 하고, 생철학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 그런 철학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그것은 철학사적인 연결고리를 생각해보자면, 헤겔 철학에 대한, 또는 독일 관념론에 대한 일종의 반동으로 출현했던 주정주의, 그 주정주의를 우리는 쇼펜하우어를 통해서 목격했다. 그런 주정주의적인 철학을 계승하고 있는 갈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전체적인 법칙보다 개별자의 실존을 중심으로 놓고 사유한다는 점에서 실존주의의 선구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런 철학을 키르케고르에서 찾아볼 수 있고, 니체와 관련지어 이야기할 수 있다. 이제 이야기할 것은 독일 관념론에 대한 반발로, 주정주의적인 철학이 만들어 나가게 되는 계열, 키르케고르, 니체 등등의 사상을 살펴보도록 하자.
키르케고르
키르케고르 자체가 실존주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서 선구자적 지위를 가지게 된 것은 키르케고르가 어떤 방식으로 철학계에서 각광받게 되었는지 경로와도 관계가 있다. 덴마크에서 일종의 개신교 사상가 내지 교회 비판가로써, 수많은 저널 활동을 했던 키르케고르가 사상사로써 높은 입지를 가지게 된 것은 그를 주목한 최초의 독자가 20세기 초반 독일 철학자들이 키르케고르를 주요하게 읽은 독자였다. 그러면서 독일 실존주의와 더불어 키르케고르가 부각되었다. 1814년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830년부터 코펜하겐 대학에 들어가서 신학을 공부하며 문학과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1840년에는 약혼하고 1년만에 파혼하게 되는데, 레비나 올슨이라는 약혼자와의 심리적인 관계, 약혼하고 파혼하고 하는 정서적인 개인사적인 관계가 그의 사상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의 작품으로는 대표적인 것이 43년에 나온 "이것이냐 저것이냐" 이것은 헤겔의 변증법과 반대되는 사고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두려움과 떨림" "반복"등의 작품을 내놓는다. 반복이라는 책은 정반합을 통해 전개되는 헤겔의 변증법과 반대되는 그런 생성, 운동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1844년 "불안의 개념", 1848년 "그리스도교의 훈련", 1849년 "죽음에 이르는 병" 등등의 작품을 펴 낸다. 키르케고르가 죽었을 때 장례식을 치룰 때, 코펜하겐에서는 대단한 혼란이 있었다. 그 혼란은 그토록 교회를 비판했던 자를 어떻게 교회 묘지에 안장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서 군중들이 분노했다. 그만큼 케르케고르는 교회 비판자로써의 사상가였고, 그런 비판자로써 그가 수행하고자 했던 것은 루터의 종교개혁 이상의 종교 쇄신이었다. 그는 스스로 앞으로 다가올 종교 개혁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이런 사실들을 키르케고르의 사상들의 핵심을 보여준다. 그것은 당대의 세속화한 교회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그리스도교라는 이름에 걸맞는 교회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 키르케고르의 사상의 목적이었다. 그런 모습은 교회 쇄신가들에 의해서 주요하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이 수행했던 것도 루터가 수행했던 것도 세속화되고 활기를 잃어버리고 계시보다는 죽은 법에 더 의존하는 당대의 교회에 맞서서 교회를 쇄신하려고 했던 것이다. 키르케고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냥 세속적인 사교장 비슷하게 된 당대의 교회를 비판하고 거쳐서 진정 그리스도교인이 무엇인지를 사유하자고 했다. 1855 11월 4일에 사망한 키르케고르는 땅에 묻히게 된다. 이런 키르케고르의 사상의 경향과 그의 삶을 배경으로 해서 키르케고르의 철학의 일반적 성격이 무엇인지 보자.
변증법 비판
헤겔 사후에 셸링이 베를린 대학에 와서 헤겔의 자리에서 가르치게 된다. 그리고 많은 기대 속에 유럽의 지식인들이 모여 셸링의 강의에 참여했다라고 이야기했고 그 중 하나가 키르케고르였다. 키르케고르는 독일 관념론 철학에 공감하지 못했다. 바로 여기에는 헤겔의 철학에는, 더 넓게 독일 관념론에는 전체 정신이 운동하는 법칙이 있지, 개인이라는 것이 자리할 곳은 없다는 것이 키르케고르가 가졌던 불만이다. 개인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 전체 법칙이 구현되는 한 고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바로 전체와 개인의 관계를 키르케고르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한다. 전체 법칙이 전개되어 나가는 과정이 바로 변증법적인 과정이고, 그것이 세계사이고, 이런 전체 법칙이 구현되는 하나의 지점, 하나의 고리가 바로 개인이다라는 것이 바로 헤겔과 관련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바이다. 반면, 키르케고르에서는 보편적인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고, 실존하는 개인이라는 것은 전체, 절대자와 단독으로 대면한다. 단독으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키르케고르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이렇게 개인의 단독성, 어떤 일반적인 법칙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개인의 독자성으로부터 사유를 시작한다는 점에서 이후 야스퍼스같은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그리고 사르트르에서도 키르케고르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비변증법적인 키르케고르의 철학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의 책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A와 ~A가 있다로 해 보자. 그렇다면 변증법이라는 것은 A가 그의 안티테제인 ~A를 거쳐 보다 상위의 통일된 단계로 나아간다고 사고할 것이다. 변증법에 관건이 되는 것은 A와 ~A 사이의 모순이 궁극적으로는 양자를 종합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 종합이 변증법적 통일이다. 그러나 이 실존하는 단독자가 관건일 때는, 이렇지 않다. 실존하는 단독자에게 A와 ~A가 주어진다고 하자. 이럴 때 이것은 양자 모두를 선택해서 통일시킬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A 아니면 ~A를 선택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실존의 의미이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지, 양자가 부정적 매개를 통해서 종합되는 것이 아니다. 부정적 매개라는 보편적 법칙, 일반적 법칙을 통해서 종합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 보편적 일반적 법칙을 통해서 종합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오로지 그 어떤 보편적 법칙에도 의존할 수 없는 단독자가 결정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 단독자는 A나 ~A를 선택할 때 그 누구의 도움도 조언도 어떤 법칙에도 의존해서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단독적인 상황, 실존적인 상황이고 절대자와 마주했을 때의 상황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어떻게 단독적인 선택의 문제가 되는지는 나중에 예를 들어 보자.
또한 이런 반변증법적인 면모를 보이기 위해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이야기했다. 그것을 반변증법적인 면모를 또 다른 개념과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다. 부정적 매개라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이야기했다면, 생성변화, 역사적 전개 등등과 관련해서 부정성을 비판하는 개념은 반복이다. 우리는 변증법적인 매개를 통해서 발전하는 과정을 살펴봤다.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런 시간의 전개라는 것은 반복되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예화한다 .반복이라는 책에서는 자기 자신의 삶과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는데, 앞서 언급한 레비나 올슨과의 약혼과 파혼 이야기를 하고 있다. 파혼 후, 나는 다시 혼자이다. 나는 다시 완전한 나 자신으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을 반복을 통한 성장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비슷한 모델을 키르케고르는 성서에서 발견하고 있다. 바로 욥이다. 욥은 이런저런 고통을 겪은 다음, 나중에 모든 것을 다시 되찾는다. 그러면서 성서에 나오는 구절에 따르면 갑절로 받았다고 한다. 이게 반복의 의미이다. 다시 되찾게 되는 것. 이런 식의 반복이 생성의 과정이지, 변증법적인 전개가 생성의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라는 개념, 반복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키르케고르 철학의 비변증법적인 성격을 보았다.
이제 키르케고르 철학의 핵심 개념을 이루는 것을 보자.
우선 개인. 개인, 실존, 불안 등등의 개념을 살펴볼 예정이다.
개인
먼저 키르케고르는 "나는 인종(인간종류, 인류)라는 카테고리를 인간이 그러해야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오해이며,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종적인 것으로써의 인류라는 것은 허구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인류는 ~~해야한다라는 것들은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개념인가? 바로 개인이 진정한 의미있는 개념이다. 무엇으로써? 단독으로 절대자와 관계할 수 있는 절대자로써. 그 외에 집단적인 것, 공동체 등등은 모두 비판적인 의미에서 대중이라고 일컬어진다. 허구적인 지위를 가지는 차원이라는 것에서. 개인이 지니는 의미이다. 단독적이고, 절대자와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자로써의 개인. 인류 공동체 등등은 허구적인 개념이다라는 그런 내용을 함축하는 개인.
실존
그럼 이제 실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실존이라는 것은 바로 개인이 처해 있는 정황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는 실존하는 개인이라는 말로, 개인은 실존적 정황에 처해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럼 이 실존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는 관찰자, 생각하는 자, 이성을 가진 자, 관조하는 자라기보다도**, 행위자**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주어졌을 때, 실존하는 자는 사변적으로 이것 A와 저것 ~A를 사변적인 통찰을 통해 변증법적으로 매개해보려고 하고, 아니면 물러선 채 양자 사이에서 양자를 관조하려고만 하는 것은 실존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존은 반드시 양자 사이의 선택을 하는 것이 선택의 의미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자, 관찰하는 자, 관조하는 자 등등이 아니라 실존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먼저 오는 지식, 즉, 이성을 통해서 파악되는 지식에 입각해서 행위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지식에 입각해서 하나를 고를 수 없다. 그야말로 자신을 피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전체 존재를 던지는 방식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이런식의 실존 개념이란 무엇인가? 지식에 입각하는 것도 아니고, 이성적 활동에도 입각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아브라함의 일이다. 아브라함은 천사의 목소리에 따라서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 그렇게 귀한 아들인데, 제물로 바치게 되었을 때, 절대자 앞에서 실존하는 개인으로 소개된다. 실존하는 개인으로 소개되다는 것은 선택해야만 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온갖 고민에 빠진다. 헛것을 본 게 아닐까, 천사가 아니라 천사로 변장한 악마가 아니었을까, 또는 내가 지금 나이가 너무 많아서 환청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닐까. 등등 온갖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생각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어디 가서 누구에게 조언을 구할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조언자, 법칙은 전무하다. 그럼 무엇만이 있는가? 이엇이냐 저것이냐, 아들을 제물로 바칠 것이냐 아니냐, 이 양자 사이의 선택만 있다. 이 선택이라는 것은 하나가 낫다, 못하다처럼 지식에 입각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택 외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게 바로 선택으로써의 실존의 의미이다. 이런 아브라함과 관련되어 있는 키르케고르가 이야기하고 있는 선택의 상황은 사르트르에서도 중요하게 부각된다. 우리의 정황이라는 것은 선택할 수밖에 없는 정황인데, 그게 실존하는 자의 정황인데, 우리는 마치 선택은 안 해도 되고 무언가 따를 수 있는 지침이 있는 것처럼 달아나 의존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로 우리는 선택의 자리를 피하려고 한다. 이것이 나중에 사르트르에서 자기 기만이라는 주제로 발전하게 된다. 선택하는 단독자라는 이 위치를 모면하려는 시도가 사르트르에서 자기 기만이다.
키르케고르로 돌아와서,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하는 실존적 정황이 절대자와 단독자가 마주하는 방식이고, 그런 뜻에서 우리는 키르케고르가 생각하는 신앙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 신앙은 단지 편안하게 안주하면서 안전하게 교회에 앉아서 사교생활하면서 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모험이다 그야말로 선택을 통해서 자신을 걸어 보는 모험이 신앙이다.
불안
키르케고르의 불안에 대해서 보자. 불안이라는 것은 나중에 하이데거를 통해서도 근본적인 지위를 가지게 되는 그런 실존 철학의 핵심적인 개념이다. 불안이란 무엇인가? 불안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불안이라는 것은 한 마디로, 불안은 자유의 가능성이다. 우리 선택하는 자는 선택을 하려면 자유를 먼저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 단독자가 사르트르에서는 자기 기만이라고 표현되었지만, 마치 그런 것처럼 스스로를 설득한다면 어떨까? 나는 자유가 없어, 나는 선택할 자유가 없는 자야.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선택이 자기의 소관이 아니라고 한다면? 내가 선택하는 자유로부터 벗어날 수 없도록 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자유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럼 어떻게 이 선택하는 자는 자유를 자각하는가? 자기가 자유로운 자임을 자각하는가? 바로 불안 속에서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을 단독자는 지각하게 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가령, 선악과를 따먹지 마라는 명령이 주어졌다고 하자. 아담은 일종의 불안에 빠진다. 선악과를 따먹지 마라는 명령은 자연 법칙과는 구분된 것으로 보인다. 자연 법칙은 가령 빛이 있으라라고 이야기했으면, 이는 어둠과 구별되서 빛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신이 빛이 있으라는 말로 빛은 밝다, 어둠과 구분된다는 사실적 법칙을 창조한 것이다. 사실적 법칙은 그 자체로 우리를 지배한다.그러나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라는 법칙은 신이 입법했지만, 자연법칙처럼 자동적으로 실행되지 않는다. 우리는 아담의 불안에서 그것을 발견한다. 아담은 자기가 그것을 어길 수도 있기 때문에 불안해한다.
불안은 자기의 자유에 대한 불안이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자유를 집어넣는 것이다. 이런 것이 불안 속에서 알려진다. 아담도 불안을 겪는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라고 명령한 것은 내가 따먹을 수 있는 가능성을 포함한다. 따먹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니까 따먹지 말라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가능성은 법을 어기고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불안 속에서 우리의 자유를 확인하게 된다. 불안이 있다는 것은 자유가 있다는 것이고, 자유가 있다는 것은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유가 있으니까 선택해야 하는 것이지, 자연법칙을 따르듯이 수동적으로 나 자신을 법칙에 내어줄 수 없는 것이다.
참고적으로 덧붙이자면, 스피노자는 이 구절을 키르케고르가 이야기했던 것과 전혀 다르게 해석한다. 신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을 때, 그는 스피노자는 자연주의자답게, 신은 오로지 자연의 인과과정만을 이야기해준 것이다. 저 과일은 너의 몸에 맞지 않는다. 이 사실만을 말한 것 뿐이다. 그러나 아담은 그런 자연 법칙을 파악하기에는 이성이 부족하고, 상상력이 뛰어난 인간이기 때문에, 이 자연 법칙을 상상력을 통해서 명령이라는 도덕 법칙으로 이해하게 된다. 금지로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해서 자연 법칙을 신의 명령으로 이해하게 된다. 자연 법칙에 대한 신의 기술을 도덕 명령으로 이해한 것이다.
실존적 선택의 세 단계
이렇게 우리는 개인, 실존, 불안이라는 이 단독자와 관련되어 있는 핵심 개념들을 설명했다. 이렇게 실존적 선택을 하는, 또는 다른말로 실존적으로 기투하는 그러한 인간은 어떤 단계를 통해서 성장하는가? 변증법이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한다면, 선택의 결과로 어떤 국면을 맞게 되고, 어떤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되는지 하는 전개의 양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보자. 변증법적인 매개가 아닌 선택을 통해 전개되는 양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보자.
그것은 실존적 선택이라는 것은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이것은 인간의 어떤 정신의 성장 과정이라고 이야기해도 좋다. 그리고 그것은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 선택이라는 것은 모험의 문제이고, 어떤 것이 옳다라고 미리 알려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 스스로의 존재 전체를 거는 그런 모험의 결과는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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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단계에서, 인간이라는 것은 감각이나 감정의 지배를 받는 인간이다. 감성적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감성적 인간의 감성적 충동에 따라서 선택하는 인물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자를 찾는다면 돈 주앙일 것이다. 선택을 하는데 끊임없이 감각적인 충동에 따라서, 감각의 지배에 따라서 선택한다. 이런 선택이라는 것은 우리가 고대에는 쾌락의 영리라는 말로 이런 것을 표현하기도 했다. 감각적인 것에 대한 추구라는 것은 보다 더 자극적인 것, 보다 더 쾌락을 주는 것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감각적인 것들을 선택하는 그런 자는 감각에서 감각으로 무한한 방황을 한다. 어떤 질적인 상승도 부재도 없이 계속 감각적인 세계에 머무르는 것이다 . 이 인간은 궁극적으로 절망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여기에서는 절망의 상황에 빠졌을 때, 궁극적인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계속 감각적인 것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삶의 형태를 가질 것인가. 여기서 비약을 통해서, 감각적인 삶을 버리고 다른 삶을 선택할 때, 새로운 국면이 열린다. 이것은 다른 형태로, 어떤 법칙에 의존해서 다른 형태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선택의 상황에서 비약하는 것이다. 감각적인 것 속에서 매몰된 채로 살 것이냐, 아니면 그와 전적인 다른 삶을 살 것인가. 이는 인간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법칙화할 수 없다. 또 무엇이 궁극적으로 옳다고 이야기해줄 수 없다. 이것은 그야말로 일회적으로 단독자에게만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일회적으로 누군가 선택하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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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약을 통해서 도달하는 것이 윤리적 단계이다. 윤리적 단계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은 소크라테스이다. 윤리적 단게라는 것은 감각적 쾌락에 의한 유혹, 식욕, 성욕 등 이런 감각적 충동을 버리고, 의무에 따라서 행위하는 것, 이게 바로 윤리적 단계의 인간이 선택하는 것이다. 윤리적 인간은 윤리적인 방식으로 , 즉 의무를 따라서, 감각적인 것을 거슬러서 의무에 따라서 해결함으로써 충족적일 수 있다. 자기 충족을 이룰수 있다. 그런 신념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데 윤리적인 완벽함 속에서 우리는 만족, 충족, 완전한 충족을 이룰 수 있을까? 여기에 인간은 하나의 한 개, 하나의 윤리적 단계에서의 안티테제, 윤리적 인간의 걸림돌을 만들게 된다. 그게 바로 죄의식이라는 것이다. 감각적 단계의 인간의 안티테제, 걸림돌은 절망이었다. 윤리적 인간이 마주체는 한계, 안티테제는 죄의식이다. 윤리적 인간은 윤리적인 의무를 다함으로써 충족적이고자 했다. 그러나 윤리적인 의무라는 것은 그것이 다 성취되지 않았을 때, 여전히 따라야 할 의무, 과제를 남겨 놓았을 때 윤리는 윤리적일 수 있는 것이다. 의무 과제를 남겼을 때. 그러므로 결국 윤리는 성취되는 바가 없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윤리적인 의무를 철저히 다하려고 하면 할수록, 한 걸음 멀어지는 무지개처럼 우리는 극복할 수 없는 죄의식과 마주하게 된다. 죄의식은 의무를 다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의 표현이다. 이것은 윤리가 윤리인 한에서 그럴 수 밖에 없다. 의무니까, 무엇무엇을 해야 하는 것을 앞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하지 못한 것을 남겨둘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윤리적 의무에 따라 사는 것은 극복할 수 없는 죄의식을 수반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나중에 프로이트가 분석하는 바이다. 법칙을, 의무를 보다 더 준수하고자 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더 큰 죄의식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어떤 법, 따라야 할 법을 세웠다. 그것을 완전하게 따랐다고 해 보자. 그렇다면 그 뒤에 남는 것은 나는 충분할 만큼 의무를, 법을 설정하지 않은 게 아닐까? 최소화한 게 아닐까?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법과의 거리를 확인하면서 죄의식에 빠지게 된다. 어찌되었던간에 의무를 다하려는 것은 그 의무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죄의식이라는 방식으로 그 의무에 우리를 묶어 놓는다. 늘 미완성으로만 달성되는 그런 의무의 형태 속에 우리를 묶어 놓는다. 이게 바로 두 번째 단계의 인간, 윤리적 인간이 마주치게 되는 안티테제이다. 이런 죄의식 속에 그대로 머물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선택을 해서 다른 형태로 비약할 것인가, 그것이 실존하는 자의 선택사항으로 주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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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단계가 아브라함으로 대표되는 단계, 신앙의 단계, 종교적 단계이다. 이것은 참된 신앙이라는 것은 신앙을 선택하는 자는 바로 신에게 모든 것을 던지는 자, 모든 것을 피투하는 자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자기 스스로 입법한 도덕 법칙으로 모든 것을 컨트롤 할 수 있어. 이런 방식의 자만심에 빠지지 않는 것. 모든 것을 절대자에 대한 신앙으로 맡기는 것이 세 번째 층위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신앙의 단계는 아브라함에서 보는 것처럼,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극단적인 신앙으로까지 표현된다. 아브라함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일은 키르케적인 단계에 비추어 보더라도 종교를 윤리 위에 놓고 있는 것이다. 살인조차 감수하는 것이므로 윤리 위에 놓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키르케고르가 윤리보다 높이 있는 신앙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키르케고르의 종교 사상이 얼마나 극단적인지 볼 수 있다. 근대적인 사고방식을 보자. 근대는 세속화의 시대이다. 그리고 세속화는 근대의 합리성과 더불어서 이루어졌다. 세속화, 근대인들의 이성의 소산인 세속화라는 것은 철학을 통해서도 진행된다. 철학은 어떤 방식으로 세속화를 진행했는가? 신을, 종교를 윤리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으로써 세속화를 진행했다. 피히테의 무신론 논쟁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피히테의 근대적인 합리성이라는 것은 바로 신을 도덕적 관계, 도덕적 법칙으로 이해한 것이었다. 이렇게 신을 도덕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은 세속화적인 현대 사회의 보편적인 방향성이다. 더 극단적으로, 스피노자는 신학 정치론에서 이 종교라는 것을 유용성의 차원에서 수용할 수 있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스피노자의 삶 안에서도 그 자신은 신앙이 없었음에도, 하숙집 아이들에게 목사님 말씀을 잘 들으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절대적인 신앙에 도달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는 도덕을 가리키니까, 그게 전체 사회에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종교를 완전히 세속화된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들 역시 세속화되어있고, 세속화되어 있다는 것은 세속 사회의 윤리와 부딪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속 사회의 윤리와 부딪힐 때, 오늘날은 종교는 바로 사이비 종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사이비 종교가 사회 안에서 등장하는 방식은 통용되는 윤리와 상충되는 것이 사이비 종교가 등장하는 방식이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철저하게 기존에 통용되는 윤리와 동화할 것을 교회에게 요구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키르케고르는 두 번째 윤리적 단계보다 상위의, 신앙의 단계를 내세운다. 아브하람의 모습은 친족살해까지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덴마크의 세속화된 교회를 그가 개조하고자 할 때, 얼마나 절대적인 종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레비나스 역시 이런 종교와 윤리는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그런 세속화를 다른 방식으로 구현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레비나스는 종교와 윤리를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키르케고르를 비판하기도 한다. 윤리보다 상위의 종교를 두었다는 점에서.
이렇게 신앙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실존하는 인간은 선택을 통해서 비약해 나가는 것이 키르케고르가 이야기하는 발전 단계, 실존하는 자의 전개 단계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런 키르케고르의 사상은 초두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후 실존철학자들을 통해 재발견되면서 매우 큰 각광을 20세기 초에 받게 된다.
니체
이제 키르케고르에 이어서 니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니체(1844~1900)
니체는 흥미로운 함의를 지니는 철학자이다. 니체는 아주 다양하게 읽힌다. 니체는 그의 여러 가지 삶의 정황들, 궁극적으로는 정신병으로 죽게 되는 삶의 정황들, 이런 것들의 그의 철학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을 심리학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해 주는 매력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니체와 관련해서, 우리는 전기적인 사실관계가 관건이 아니라면, 니체의 성격을 이해하는게 관건이라면, 토마스 만이 쓴 파우스트 박사를 추천한다. 마의 산이나 파우스트 박사라는 책을 보기 바란다. 영혼을 악마에게 판 파우스트 박사를 독일에 투영시키고 있는 작품이다. 토마스 만은 이 작품을 자기가 집필하고 있을 때는 니체 소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주인공 음악가 아드리안 레베퀸에게 니체를 투영하고 있다. 레베퀸이 낯선 도시에 도달하고, 수상한 안내자에 따라서 사창가에 가게 되고, 매독에 걸리게 되고, 정신병에 걸려 죽게 된다. 이것은 니체의 삶 그대로이다. 그러나 단지 전기적인 사실만을 나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함축되어 있는 근본적인 의미들을 드러내보고자 한다는 점에 있어서도 읽어 보길 권한다.
니체는 이렇게 그 자신이 심리학적인 연구 대상일 뿐 아니라, 그의 글들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읽힌다. 우리는 지금 주정주의, 생의 철학, 실존주의와 관련지어서 니체를 이야기했다. 이렇게 실존주의나 생철학과 관련해서 니체를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예를 들면 하이데거의 니체 연구가 보여주는 것은 니체를 근대성의 최정점에 오는 근대 형이상학의 최정점에 오는 철학자로 해석하고 있다. 들뢰즈의 1960년대 나온 니체와 철학에서는 니체를 일종의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예고하는 노마드의 철학자, 포스트모던적인 철학자로 이해하고 있다.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거리는 멀지만, 니체는 양자 모두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만큼 니체는 해석할 수 있는 폭이 넓다. 그 이외의 것은 니체 철학이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에서도 이야기할 수 있지만,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분명하게 써놓은 것이 없다. 니체의 글을 아포리즘적인 글쓰기로 이해할 수 있다. 단편적인 글쓰기.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의 작품이라는 것은 단편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그들이 일부러 단편을 남기려고 해서 단편이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세월의 과정 때문이다. 그리고 이 조각난 글들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헤라클레이토스를 통해서, 다른 철학자들을 통해서 아주 많은 그 여백을 채울 수 있는 풍부한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
니체의 글들은 애초에 탄생부터가 아포리즘적이었다.니체의 글들을 본다면 즐거운 지식이 되었건, 모두 다 아주 짤막한 글들, 조각글들로 되어 있다. 이렇게 단편적으로 번쩍이는 아이디어를 보인다. 그만큼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리고 이런 단편적인 글쓰기, 이런 것은 역사적인 맥락에서 볼 때는 체계를 세우려는 독일 관념론의 구성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제 니체를 보자. 니체는 처음에는 고전문헌학자로 연구를 시작했다. 고전문헌학이라는 것은 그리스 문학에 대한 연구였다. 바로 철학의 정수에 접근하는 그런 연구였다. 그리고 쇼펜하우어를 접하게 된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써의 세계를 사게 되고, 그 책을 읽으면서 쇼펜하우어를 스승으로 삼게 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로부터 그렇게 독일 관념론에 반대하는 관점들 등을 이해히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계승하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쇼펜하우어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우리는 의지의 노예이기 때문에 삶이 고통으로 차 있고, 그래서 의지의 부정이 필요하다는 것었다. 니체에게서는 반대이다. 힘에의 의지, 힘의 의지가 근본적인 것이고, 이 힘의 의지는 부정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긍정되어야 할 것으로 나타난다. 힘의 의지의 긍정이라는 것은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니체는 처음에 그렇게 고전 문헌학자로 출발하고, 동시에 이 바그너의 음악에 매료되면서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 출간하게 되는 것이 그리스 비극에 관한 연구인 "비극의 탄생"이라는 책이다. 이 비극의 탄생이라는 것은 그리스 비극에 대한 연구이지만, 문헌학적으로 충실한 것이기보다도 그리스 비극을 언급하면서 현금의 독일 문명을 비판하고, 바그너의 악극을 그리스 비극이 했던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문화의 활로로써 제시하는 것, 이게 바로 비극의 탄생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비극의 탄생이 1872년에 나오고, 1873~76년 사이에 반시대적 고찰이 나오게 된다.그리고 76년 이후에는 바그너와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