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2 서양현대철학사
포스트 : 2023.08.01.
최근 수정 : 2023.08.01.
니체의 초기저작 비극의 탄생을 언급했다.
니체 철학의 초기에는 비극의 탄생을 중심으로 서양 문명 비판이 수행된다. 서양 문명 자체를 이성적인 것, 아폴론적인 것과 파토스적인 측면, 즉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결합으로 보고, 파토스적인 에너지의 억압을 ?문명의 힘의 약화로 이해하는 것이 비극의 탄생에서 이루어진 작업이다.
이런 비극의 탄생에 이어서, 1876년부터는 다른 관심사가 출현한다.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이 첫 번째 시기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고, 이 첫 번째 시기에서는 파토스적인 에너지가 약화되는 계기를 합리주의에서 찾았다. 그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를 합리주의의 대표자로써 비판적으로 접근했다.
두번째 시기는 1878년에서 1879년 사이에 씌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작품이 있다. 여기에서는 첫 번째 시기와는 다르게 합리주의에 대한 긍정, 과학에 대한 애호가 표현된다. 그리고 1885년부터,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같은 작품으로 대표되는 니체의 세 번째 시기. 이 시기에는 니체의 독창적인 개념들을 가지고 니체의 철학이 완성되는 단계이다. 힘의 의지, 영원회귀 등의 사상이 정리된다.
이렇게 크게 세 시기 정도가 있고, 그의 작품을 좀 더 보자.
1881년 "서광", "즐거운 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76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학', "안티크리스트"
안티 크리스트는 그리스도교 비판을 수행한다. 비판 대상이 그리스도와 바울을 향한다. 그러면서 서구의 대표적인 종교 그 너머를 사유하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말년에 니체는 두통, 정신병 등으로 고생하면서 활동했다. 1889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발작을 일으켜서 정신병원에 수용되고, 사망할 때까지 명원에 있게 된다.
니체의 사상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니체는 대단히 파격적인 방식으로 서구 문명 자체를 전면적으로 비판했다는 점에서, 비판적 파괴력을 느끼는 사람들에 의해서 널리 읽히는 사람이다. 그런 면모라는 것은 비극의 탄생에서도 잘 나타난다.비극의 탄생이라는 것은 고전문헌학자로써 그리스 비극을 연구하지만, 그리스 비극 자체를 문헌학적으로 연구하는 것 보다도, 자기 시대의 문명을 비판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유럽 문명을 위기에 처한 문명으로 진단하는 것이 비극의 탄생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또, 철학자들에게서 대체로 본다면, 자기 시대를 일종의 위기의 시대로 진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칸트에게서도 그런 면모를 보았다. 자기 시대 문화의 좌절, 징후를 독단론과 회의론의 싸움터가 된 형이상학이라는 학문의 장을 읽어냈다. 나중에 하이데거 역시 유럽 문명을 허무주의로 진단하고, 후설 또한 유럽 학문의 위기를 진단한다. 대중적인 역사학자 슈펜들러도 서구의 황혼이라는 개념으로 유럽의 위기를 진단한다. 이런 유럽의 문명 자체를 위기에 빠진 것으로 진단하는 것은니체에서 두드러지는 것이기도 하다. 서구 문명을 두 가지 축을 가지고서 이야기하고 있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스소적인 것이다. 아폴론적인 것은 질서, 규율, 정돈 등을 뜻하고, 이성을 뜻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삶에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삶의 에너지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런 삶의 건강한 에너지가 합리주의, 아폴론적인 것의 과대함을 통해서 억압되는 과정을 소크라테스 이후의 서양 문명의 과정으로 보았고, 그것으로부터 출현한 부정적인 면모를 자기 시대의 독일 문화를 통해서 읽어냈다. 합리주의를 채용한 독일 문화는 어떻게 스스로의 힘을 약화시켰는가? 획일적인 범용화라고 할 수 있다. 제도적으로 보자면 민주주의, 사회주의를 등 편차를 지닌 정치 제도에 모두 다 내재하는 것이 합리주의이다. 만주주의나 사회주의에서는 삶을 획일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삶을 범용화시키는 형식성 안래에서 억눌리게 된다는 것이 니체의 서구 문명에 대한 진단이다. 이런 것으로부터 삶의 에너지를 찾을 수 있는 길을 그리스 비극에서 발견한다. 그러니까 그리스 비극에 의해 출현했던 삶의 건강성을 보여주는 에너지가 소크라테스라는 철학의 출현으로 인해서억눌렸고, 억눌린 것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가 수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당대의 그리스 비극의 정신을 전수받고 그것을 새롭게 독일 문명 안에서 실행하고 있는 것을 바그너의 작업에서 찾았다. 이게 비극의 탄생의 주요 골자를 이루는 내용이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건강성을 보여주는 것을 비극에서 찾고, 현대적인 복원을 바그너에게서 기대하는 것이 니체의 작업이다. 이것은 당시에 그리스 비극 연구로써는 학계의 비판을 받았다. 전혀 고증적이지 못하고, 니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비극을 통해서 한다. 이렇게 비극 연구로써는 이 책은 별로 평가할 바가 없다고 이야기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니체에서 기대할 만한 것은 문헌학적 충실함을 가진 연구가 아니다. 니체 스스로의 독창성이 어떤 방식으로 표출되는지가 우리가 초점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비극의 탄생을 평가할 수 있다.
도덕에 대한 비판
비극의 탄생에서 수행된 이후에 보다 구체적으로 통용되는 도덕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도덕에 대한 비판은 여러 저작에서 나타나지만, 너무나 인간적인 이라는 작품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비판의 핵심은 무엇인가? 도덕은 사회 일반을 유지하고자 하는 수단이며, 그런 사회를 파괴로 움직이는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도덕의 의미는 기존 사회를 유지하는 수단으로써의 지위를 지닌다는 것이다. 기존 사회의 질서란, 획일화되된 범용성이라 특징지어지는 것이다. 획일화된 범용성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하는 것이 도덕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도덕 비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도덕 비판이라는 것은, 선악의 저편이나 도덕의 계보학 등에서 어떤 방식으로 발전하는가 하면, 도덕을 두 가지 종류로 나누는 그런 형태로 이루어진다. 노예의 도덕과 군주의 도덕이다. 군주의 도덕은 고상하고 노예의 도덕은 비열하다 등으로 표현된다. 니체의 용어들, 다소 생경해 보이는 용어들에 너무 집착해서 니체의 철학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어떤 계급적인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함의가 무엇인지를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가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군주 도덕의 특징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노예의 도덕의 특성은 무엇인가?
- 노예의 도덕이란 동정, 친절, 겸손 등으로 표현된다.
- 군주 도덕이라는 것은 인간의 고양이다.
그렇다면 동정, 친절, 겸손으로 표되는 노예의 도덕을 비판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니체의 관점이란 동정, 친절, 겸손의 배후에서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니체는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기원을 가지는 것으로써 동정이나 친절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노예의 도덕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교적 도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동정, 겸손같은 것이 왜 비판받는가? 그것은 애초에 주어진 우리의 원초적 힘이라는 것을 굴절시키는 데서 성립하는 것이 이런 도덕적 덕목들이기 때문이다. 겸손이라는 것은 자기가 가진 힘의 굴절에서 표현되는 것이다. 동정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에 필요한 것은 타인이 가진 힘을 원래대로 발현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지, 그의 힘이 굴절된 상태 자체를 존중해 주는 것이 동정이다. 그것보다 타인이 가진 힘 자체가 원초적으로 발현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것이 타인을 노예 상태에서 군주 상태로 이끌어줄 수 있다. 니체의 문명비판적인 진단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교와 함께 노예의 도덕이 유럽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노예의 도덕에 대한 비판은 그리스도교 비판을 통해 서구 문명의 회복을 꾀하는 일이라고 이야기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어떤 방식으로 그리스도교는 노예의 도덕을 통해서 유럽을 지배하게 되는 것인가? 이를 탐구하고 있는 것이 도덕의 계보학이다.
문명 비판. 비극의 탄생 → 서구 철학을 도덕의 차원에서 비판. 그것은 노예의 도덕 → 노예의 도덕이 어떻게 탄생했는가?
도덕의 계보학
gyniology. 계보학.
더 정확한 뜻은 니체가 수행하는 작업에 걸맞는 명칭은 도덕의 발생학이다. 서구 도덕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가. 이 책은 현대 철학에서도 니체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현대 철학에도 아주 많은 영향을 주었다. 도덕의 계보학, 도덕의 발생학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엘, 안티오이디푸스, 푸코의 감시와 처벌 이런 작품들이 계보학에 지대한 영향을 받고 만들어져싿.도덕의 계보학을 살피기 위해서, 니체는 이 책에서 고대의 형벌 제도를 살펴본다. 힌두 법전에 남아 있는 형벌 등을 살펴본다. 고대의 형벌 제도를 살펴본다는 것은 인류학적, 민족학적 작업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것들은 많은 자료를 필요로 하는데, 니체는 빈곤한 자료밖에 없었다. 니체는 오히려 자료보다는 직관력에 의존해서 고대의 형벌 제도를 고찰하고 있다. 들뢰즈의 안티오이디푸스는 도덕의 계보학을 모델로 삼고 있는데, 현대의 많은 족학적 자료들을 활용하면서 비슷한 작업을 수행한다.
니체의 분석에 따르면, 고대의 형벌이라는 것은 일종의 해방을 위한, 또는 해방을 기념하는 축제의 장이었다.형벌은 어떤 맥락에서의 형벌인가? 채무 관계에서의 형벌이다. 여기서 이것을 우리는 니체의 부채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형벌이라는 것은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관계에서 성립한다.빚을 돌려바지 못햇을 때, 법정에 서게 되고, 재무자는 형벌을 받게 된다. 고대의 형벌이란 신체형의 특징을 지니고,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사용했던 표현을 사용하자면, "신체형의 화려함"으로 특징지어진다. 오늘날의 형벌이라는 것은 신체에 가해지는 야만적 폭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 고대 문명을 재현한 장면에서, 형벌에 빠지지 않는 것은 신체에 대한 잔혹행위이다.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형벌에 부합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해방이다. 채권자도 채무자도 부채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채무자의 신체에 가해지는 폭력이라는 것은 채권자가 돌려 받는 일종의 잉여가치이다. 채권자의 눈이 즐기는 가치가 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잉여 가치를 누림으로써 부채를 돌려 받는 것이다. 아이들끼리 분쟁을 해결하는 방식, 빚을 해결하는 방식은 한대씩 때리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고통으로부터 잉여 가치가 창출된다고 할 수 있다. 잉여가치를 누리는 것은 채권자의 눈이 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신체 형을 통해서 채권자는 빚을 돌려받고, 채무자는 빚을 갚고 이런 식으로 부채 관계로부터 해방되는 축제의 장이 고대의 형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런 부채관계를 전혀 다른 것으로 변형시킨다. 이제 서구의 도덕의 탄생을 마련한 기독교적 방식을 보자.
기독교 역시 부채관계를 핵심으로 잡고 있다. 신과 피조물들 사이의 채무 관계이다. 죄지음이라는 빚이 생긴 것이다. 마땅히 빚을 진 사람이 빚을 갚고 그로부터 정당히 해방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과의 부채 관계라는 것은 신이 자신의 아들을 보내서 빚을 대신 갚아준 것이다. 이를 부채를 대신 갚아주는 것이 그리스도에 의한 대속이라는 것이다. 대신 죄값을 치르는 것이다. 이 대신 갚아준 것은 신 자신이다. 신 자신이 자기자신과 동일하다고 표현되어도 좋을 아들을 보내서 갚아준 것이다. 채권자가 채무자의 빚을 대신 갚아 주었으므로, 채권자는 그 빚으로부터 영영 해방될 가능성을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 빚으로부터 영영 해방되지 못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고착되는가? 죄의식, 원죄라는 관념으로 고찰된다.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죄라는 형태로 고착된다. 그런데 원죄라는 것은 무엇인가? 원죄는 타고난 자기 자신의 힘을, 그것이 사유하는 힘이 되었건, 존재하는 힘이 되었건 욕망이 되었건 타고난 자기 자체의 힘 자체르 부정하는 데서 성립한다. 나의 존재 자체가 죄가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힘을, 또는 스스로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대면하지 않고 부정적으로 대면하는 방식이 원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은 애초에 스스로의 힘 자체가 부정의 대상으로, 죄 지은 힘으로 그렇게 나에게 인지되므로, 호소할 것은 죄 지은 대상에 대한 동정이다. 애초에 탄생 자체가 죄를 짓고 있으니까 불쌍히 여기라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죄 지은 자는 당연히 겸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정 겸손 등의 덕목이 원죄로부터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죄라는 것은, 이것은 스스로에 대해서는 그러므로 부채의식, 신에 대한 부채의식이라는 것은 죄의식으로 표현된다. 누군가 신의 부채를 갚아 준 이 신을 외부의 타인이 모욕할 때, 이교도들이, 그럼 이 죄의식이라는 것은 나 스스로를 향했던 죄의식은 외부로부터 타인에게 투영될 때는 타인이 개입하는 방식은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죄의식이라는 것은 타인을 향할 때는 원한이 된다. 그러니까 하나의 부정적인 정서가 내면으로 자기 스스로 향할 대 죄의식이 되고 타인에게 투영될 때는 원한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근본적인 서구 도덕을 이루는 두 가지 정서가 생겨나게 된다. 죄의식과 원한.
스피노자의 작품 중에 소론이라는 미완성 작품이 있다. 여기서 "원한과 죄의식(양심의 가책)이 두 가지는 인류의 적이다"니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원한과 가책을 비판적으로 변형하고 있는 것이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니체는 스피노자를 직접 읽지는 않았는데, 스피노자 철학을 접하고 나서 깜짝 놀랐다고 전해진다. 바로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스피노자가 먼저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를 알게 된 날, 쓴 편지에서는 "나는 대단한 선배가 한 명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쓰고 있다. 소론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언급했듯이, 스피노자에게 있어서도 타고난 힘을 긍정하는 것이 핵심이 된다. 그것을 왜곡시키고 부정하는 매커니즘들을 고발하는 것이 니체에서 뿐만 아니라 스피노자에게서도 핵심적인 것이다. 그것이 스피노자에게서는 세 가지 지식 가운데 일종의 지식에 대한 비판이었다. 자연 법칙이라는 것을 상상력을 발휘해서 신의 도덕법으로 이해하고, 신의 도덕법으로 이해했을 때 초래되는 것이 신이 주는 벌에 대한 공포였다. 공포라는 방식으로 신의 벌 앞에서 죄 지은 자로써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 스스로의 힘을 굴절시키는 것이 일종의 지식의 만연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런 식의 비판을 도덕의 비판에서도 발견하고 있다. 도덕의 계보학이라는 것은 현대 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매달아 죽였다. 더 이상 우리의 죄를 씻을 길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야기했던 것처럼, 미셸 푸코의 작업이라는 것은 형벌 제도의 변천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고대적인 신체형의 화려함으로부터 형벌이 점점 더 신체에 가해지지 않고 내면적이 되는 과정으로 근대적인 형벌의 발전을 발견한다. 그 과정에서 도덕의 계보학의 착상을 발견한다.
더 인상적인 도덕의 계보학의 계승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이루어진다. 우리의 원초적인 힘을 굴절시키는 매커니즘의 고발이 일어난다.현대에 그런 일을 수행하느 것은 무엇인가? 현대의 성직자들이 그런 역할을 수행한다. 끊임없이 죄 지은 자로써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 현대의 그리스도교의 성직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정신분석학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정신분석학이 보편화된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느낀다. 유럽에서는 정신분석학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유럽인들 특유의 개인화된 삶과도 연관이 되어 있다. 우리의 정서상 정신분석학이 보편화되기 어렵다. 우리는 기한이 정해진 시일 안에 구체적인 치료들을 기대한다.정신분석학은 그런 것이 아니다. 평생 상담하는 친구같은 것이 되는 것이고, 완치가 아니라 평생 이야기하는 개념이다. 그런 것이 유럽인들의 삶에는 기본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분석학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로 죄의식에 얽매는가? 그 이론에서 핵심적인 분을 차지하는 발견할 수 있다. 외디푸스 컴플렉스 자체가 우리 자신의 욕망을 죄 지은 욕망으로, 아버지를 증오하고 금지된 대상으로써 어머니를 욕망하는 방식으로 우리 욕망을 파악하고 있다. 이렇게 스스로를 죄지은 욕망으로 이해하도록 해 주는 것이 외디푸스이다. 이런 우리의 원초적인 힘을 죄로 파악하게 하는, 굴절시키는 메커니즘 자체를 정신분석학에서 발견하고 있다. 부성적 법이라는 것은 가족 안에서의 아버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니체가 발견한 기독교적인 신을 가리킨다. 전통 등으로 표현되는 아버지를 훼손한 사람에게 원한을 갖게 된다. 외디푸스 비판이라는 것은 그렇게 스스로를 죄지은 자로 발견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고, 이방인에 대한 혐오에 대한 비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비판이 안티 외디푸스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기본 틀은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수행했던 바이다.
니체의 신 비판
이제 비극의 탄생을 통해서 서구 문명 비판을 보았고, 도덕의 계보학을 통해서 노예 도덕을 읽어 보았다. 이제 우리 니체의 신 개념에 대한 비판을 보도록 하자. 이와 관련해서는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등의 작품을 보자.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상의 황혼"에서, "신의 개념은 실존에 대한 최대의 난점이다." 안티 크리스트에서는 "신과 함께 삶과 자연과 삶의 의지의 싸움이 선포된다. 신은 이 세상에 대한 모든 중상의 정식이며, 저 세상에 대한 모든 거짓말의 정식이다." 모든 거짓말을 대표하는 것이 신이라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신을 비판하고 있는가? 우리는 기독교적인 도덕을 비판하며 왜 신이 비판되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 신은 그리스도교적인 신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힘을 약화시킨 형태가 우리의 힘을 죄의식속에서 파악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 신은 죽었다라는 것을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보자. 실존의 최대 난점이 신 개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신을 통해서 어떤 방식의 왜곡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그야말로 저 세상, 내세에 대한 발명이다. 안티그리스도라는 자작품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사도 바울이 비판의 대상으로 떠오른다고 이야기했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을 어떤 방식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
그 전에 덧붙이자면, 니체에서는 질투심조차 읽어볼 수 있다. 니체가 수행하고자 하는 작업이라는 것은 이미 사도 바울이 수행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이 수행한 것은 유대교를 문닫고, 새로운 종교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주의가 지배하고 있던 로마를 기독교적인 문명으로 바꾸는 것이 사도 바울의 작업이다. 한 마디로, 사도 바울은 유럽 문명에서 가치의 전도를 이룬 자라고 할 수 있다. 니체가 수행하고자 하는 것이 기독교에 맞서서 가치의 전도를 수행하고자 하는 것이 니체의 작업이다. 이 사도 바울에 대한 니체의 과도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에 대한 시기심과 모방하고자 하는 니체의 심리도 읽어볼 수 있다. 가령,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영원회귀 등의 사상에 어떻게 접근하게 되었는지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느 순간 정오에 짜라투스투라의 사상이 덮쳤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기독교들을 사도 바울이 박해하러 가다가 그리스도가 갑자기 출현한다. 박해자 사울은 바울로 뒤바뀌게 된다. 한 순간의 깨달음이 바울에게서도 일어났다. 니체의 사건은 바울의 사건을 모방하고 있는 사건이라고 해도 좋다.
신은 죽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기독교 비판이다. 내세의 발견에 대한 비판이다. 안티 크리스트에서, 로마 시대의 명망 있는 지식인들은 그 당시에 모두 에피쿠로스주의자였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에게서는 내세가 없다. 에피쿠로스주의의 언명이라는 것은 이렇게 표현된다. "네가 있으면 죽음이 없고, 죽음이 있으면 네가 없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는 모든 것이 분해되므로 고통을 느낄 무언가가 없다." 이런 깨달음을 가지게 된다면 필멸하는 것도 즐겁게 된다. 필멸이라는 것은 현세적인 삶의 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므로 필멸도 즐겁다는 것은 우리 삶에 대한 완전한 긍정이다. 더이상 내세가 없고, 현생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니체가 평가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를 무너뜨릴 방법을 알았다. 그것이 내세의 발명이라는 것이다. 내세의 발명을 통해서 우리를 공포스럽게 만드는 방법을 알았다. 그렇게 함으로서 내세를 발명했다는 것, 참다운 것은 내세이고, 현세적인 삶은 내세에 복받기 위한 정거장과도 같은 것이다. 현세라는 것은 참된 삶에 비하면 죄 지은 삶이다라는 식의 사고 방식으로 내세, 지옥의 공포를 불러옴으로써 현세적인 삶을 부정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런 방식으로 에피쿠로스 주의자들의 건강한 이 생의 행복에 만족하는 삶이라는 것은 완전하게 노예 상태가 되는 것이다. 내세에서 받을 죄값에 대해서 늘 공포를 느끼는 삶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로마를 지배하는 방법이라고 안티크리스트에서 분석하는 바이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제 삶이 내세와 현세가 거꾸로 되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부정적인 것이며, 허무적인 저 편의 삶이 진정한 삶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의 바탕에는 바울이 있지만, 철학적으로는 플라톤주의가 있다. 플라톤의 파이돈 편의 사상은 참다운 삶이라는 것은 저 편의 삶이라는 것이고, 현세의 삶은 내세의 삶을 위해서 준비되었다는 것이다. 영혼 불멸론과 더불어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 그러므로 한 편으로 이것은 바울을 통해서 고안된 기독교적인 사고방식, 즉 지옥과 내세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면서, 플라톤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참다운 것을 현세적인 삶 이후의 내세에서 이데아계에 가는 것에서 참다운 삶을 발견하는 것. 그러므로 해서 내세의 발견, 초월적인 것을 발견으로서 우리에게 사실로써 주어져 있는 것, 원초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생명, 차안의 삶이라는 것을 우리는 부정적으로만 대응하게 되었다.
죄의식속에서 대면하게 되었고, 내세를 위해서 준비해야 하는 삶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유일무이하게 긍정되어야 하는 것이 차안의 삶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우리 존재의 약화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전도시켜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 자체를 긍정하는 것을 문명애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신은 죽었다라는 말이라는 것은 그러므로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신의 자리의 죽음이다. 신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들은 계속해서 변모되어 왔기에 그렇다. 그것은 기독교적인 신이 초월적이니 신의 자리를 차지했고, 안티 외디포스에서는 시대에서는 신으로 비판받는 것은 이제 아버지이다. 여러 가지 형태로 변모되어 출현하는 부성적인 법이 신의 자리를 차지한다. 궁극적으로 철학사를 통해서 니체의 아이디어에 힘입어 수행된 비판적인 작업이라는 것은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회귀하면서 출몰하는 신의 자리에 대한 비판이다. 이렇게 신을 부정하는 니체의 작업이라는 것은 허무주의, 니힐리즘으로 귀착된다.
니힐리즘
니힐리즘은 니체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왜 허무주의인가? 기존에 있었던 모든 가치가 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기존에 있었던 모든 가치의 바탕에 굳건한 기반이 있던 것이 아니라, 거짓된 기반만을 가진다는 것, 기반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겸손, 동정을 떠받치고 있는 기반이라는 것이 사실 없다는 것이다. 허구적인 내세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렇게 서구 문명의 기반이 실은 없었다는 것에 대한 발견이 허무주의이다. 허무주의는 그러므로 긍정적인 새로운 문명, 새로운 도덕을 준비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허무주의는 긍정적인 것이다. 근본적인 도약을 준비한다는 의미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다.니체는 허무주의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땅 위에 일찍이 없었던 전쟁이 있을 것이다. 오직 나 다음에 비로소 큰 정치가 땅 위에 있을 것이다."
힘에의 의지
모든 것의 기반이 무임이 드러난 이후에는 새로운 가치를 세우기 위한 전쟁이 도래할 것이다. 이런 니체의 허무주의를 통과해서 도달하게 되는 새로운 사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니체의 두 가지 핵심 개념을 축으로 하는 그의 형이상학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두 가지 핵심 개념이라는 것은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라는 두 가지 개념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등등에서 이야기되고, 니체의 많은 유고들 속에서 발견된다. 모든 것의 본질을 힘으로 받아보는 것, 그것이 니체의 힘 개념에서 핵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는 *"이 세계는 힘에의 의지이다. 그리고 그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한다. 이런 원초적인 힘의 의지가 있고, 이 힘을 굴절시키는 것, 그래서 죄지은 것으로 만드는 것이 기독교이다. 이런 것에 맞서서 그런 노예 도덕에 맞서서 원초적인 힘의 의지를 긍정하고 회복하는 것이 주어진 삶에 대한 운명애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니체가 스승으로 삼았던 쇼펜하우어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자.
쇼펜하우어도 이 세계는 의지이고, 의지가 바로 세계의 표상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쇼펜하우에게 있어서 의지를 따르는 것은 계속해서 노예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진단되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에서 핵심적인 것은 의지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니체에게서는 반대이다. 이 세계는 힘의 의지이지만, 그 자체가 긍정되어야 할 것, 적극적으로 추구되어야 할 것이지 근절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쇼펜하우어와 니체 사이에서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힘이 모든 것의 본질이다. 그리고 그 힘을 원래적인 모습대로 있도록 해 주는 것이 힘에의 의지이다.
이런 힘의 의지라는 개념은 모든 것의 본질을 힘으로 보는 것, 이것은 니체에게서만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개별자들의 본질은 코나투스로 이야기되었다. 일상적인 말로는 욕망이다. 존재 안에 머무르려는 욕망. 이런 것도 힘을 개별자의 본질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에게 있어서 모나드라는 것은 원초적인 힘이었다. 이것은 모두 다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 연장, extension을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 보았던 데카르트에 맞서서, 연장적인 것, 이것은 결과로 출현한 것이고, 본질적인 것은 힘이다라는 주장을 함축하고 있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도 신은 두 가지 근본적인 힘을 가진다. 존재하고자 하는 힘, 사유하고자 하는 힘. 이 힘은 각각 연장이라는 속성, 사유라는 속성을 통해 표현된다. 신의 본질은 힘이다.
이렇게 힘을 근본적인 것으로 발견하는 선대들을 니체는 가지고 있다. 그런 역사적인 맥락 안에서 니체의 힘에의 의지도 이해해야 한다. 이런 힘이 가장 근본적인 것이고, 이성 활동같은 사변적인 활동이라는 것은 힘에 대해 2차적이라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에 있어서도 이성이라는 것은 의지의 도구이다. 니체와 관련해서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인식은 힘의 도구이다. 인식이라는 것은 힘의 증대와 더불어서, 증대하고, 힘의 감소와 더불어 적어진다. 자기의 힘을 실현하는 방식이 인식을 비롯한 사변적인 방식, 사변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식이라는 것은 힘의 관점의 지배를 받는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가진 힘에 따라서 가령 내가, 가진 힘, 쇼펜하우어와 관련해서 비유했는데, 갈증, 식용 등등을 예로 들자. 이런 것들은 실현되기 위해서 이성적 추론을 도입한다. 어떻게 해야 우물을 팔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힘의 관점에 따라서 우리의 인식력은 증가한다. 어떻게 우물을 잘 팔 수가 있고, 갈증을 만족시킬 수 있다. 씨앗을 잘 심어서 싹을 틔우고, 수확을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힘의 의지에 의해서 관점지어진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진리라는 것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힘의 의지에 따라서 생겨나는 것이다. 어느 특정한 관점에도 의존하지 않고, 중립적인 것으로써의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 진리는 플라톤의 이데아같은 데서 찾을 수 있다. 인식하는 자의 관점에 의존하지 않고, 영원불멸한 것이 플라톤의 이데아로써의 진리이다.
관점주의/전망주의
그러나 니체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항구적인 진리라는 것은 철학자들의 허구적인 창작물이라는 것이다. 인식이라는 것은 힘의 의지의 관점에서 출현한다. 이렇게 힘의 의지의 관점에 따라서 진리가 바뀐다는 사상을 바로 니체의 perspectivism, 관점주의, 전망주의이다. 이런 용어로 부른다. 진리는 요약하면, 항구적이지 않고, 힘의 의지의 관점의 소산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 perspectivism이라는 말을 그렇게 이해해볼 수 있다. 다시 한 번 관점을 예로 들어 보자. 이 쇠는 좋다라고 이야기 해 보자. 어떤 관점 없이 무작정 이 쇠가 좋다라고 이해할 수 없다. 이 쇠는 단단해서 망치를 만들기 좋다처럼 관점을 가지고서만 이야기할 수있다. 이 쇠는 나쁘다. 테니스 라켓을 만들기에 너무 무거워서. 이런 식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바로 망치나 테니스 라켓이나 이런 것은 우리가 왜 필요로 하는가? 그러니까 바로 욕구, 우리의 힘에 의존해서만 어떤 대상은 좋다, 나쁘다, 적합하다로 나뉜다. 쇠에 대한 인식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의 욕구, 우리의 힘에 의존해서. 이런 것을 통해 우리는 니체의 perspectivism를 예화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그렇게 모든 것은 힘의 필연이고, 우리의 존재 뿐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는 바 역시 그렇다.
초인사상/인간학 비판
이런 힘의 의지에 충실하기 위한 것, 충실하기 위한 길을 니체의 초인사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니체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인류가 아니라 초인이 목표인가? 인간은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니체의 초인사상을 대표하는 말이다. 이 초인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은 다리이지 목표가 아니다." 이야기했던 것처럼, 원초적인 힘을 부정적으로 매개하지 않는 것, 그 자체로 긍정하는 것이 초인 사상이 놓이는 바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넘어서야 하는 대상으로써 인간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힘의 의지를 왜곡시키는 것으로써의 인간 개념이다.
이렇게 인간 개념 자체가 우리가 가진 원초적인 힘을 왜곡시키는 것이라는 발견, 그리고 이에 대한 비판으로써 인간 개념을 해체하고자 하는 것이 현대 철학에까지 그 착상이 계속되고 있는 반인간주의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현대의 대표적인 반인간주의라는 것은 니체의 초인 개념에 기원을 두고 있다라고 할 수 있다.
인간 개념을 비판한다는 것은 인간 개념을 만들어낸 학문을 비판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학이다. 초인이라는 것은 인간학에 대한 비판이다. 인간학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로 표현되어 왔다. 그리스도교적 인간학, 종교적 인간학이 있다. 그리고 철학적 인간학이라는 것이 있다.
- 종교적 인간학이라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모상에 따라서 창조된 자라는 것이 인간 개념을 종교적인 차원에서 인간 개념을 형성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서 창조되었다는 것의 함축을 알아보자. 우리는 원래 하느님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즉, 선함 등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하느님과 달리 감성적으로 현존하기 때문에, 감성적 요소들, 예를 들면 욕망 등에 지배받고 있다. 이렇게 해서 신의 본성이 우리에게는 왜곡된 형태로 나타난고, 죄 지은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바로 욕망 등으로 표현되는 우리의 감성적 현존으로부터 벗어나서 참된 신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기독교 비판과 더불어서 이것이 얼마나 우리가 지닌 원초적인 힘을 죄 지은 것으로 발견하게 하는지 보았다. 따라서 인간 개념에 대한 비판은 필수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 그리고 철학적 인간학을 보자. 대표적인 것을 칸트의 작품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에서 볼 수 있다. 칸트는 20여 년 이상 한 강의록을 묶어 펴낸 것이 이것이었다. 그리고 당대에 이 책은 베스트셀러였다. 이것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다. 의학자에게는 장소식품학같은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도덕적 존재이므로, 이 도덕적 존재가 감성적 조건에 의해서 훼손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장수하는 것의 목적이다. 건강이 나빠진다면 우리의 감성적인 것 이상의 도덕적인 존재로써의 우리 모습이 훼손된다. 이런 방식으로 건강식품학같은 것에도 칸트적인 인간 개념이 깔려 있는 것이다. 칸트를 통해서 다져진 인간학이라는 프로그램 자체를 그 인간학 안으로 들어가서 인간의 속성이 무엇이네 그렇게 첨언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인간학이라는 프로그램 자체를 종결지은 것이 니체의 초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