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4 서양현대철학사
포스트 : 2023.08.01.
최근 수정 : 2023.08.01.
인간학에 대한 니체의 반대되는 입장을 보고 있었다. 인간학이라는 것은 18세기 이후 주요한 철학적인 관심사였다. 대중적으로 칸트의 실용주의적 관점의 인간학이 널리 읽혀졌다는 사실에서도 사람들이 관심 가졌던 주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철학적 인간학이나 신학적 인간학으로도 오늘날 자리잡고 있다.
니체가 해온 작업이라는 것은 이런 인간학이 만들어내고 있는 인간에 대한 규정의 허구성을 고발하는 것이다.
- 가령 원죄에 대한 니체의 분석은 신학적 인간학, 인간은 피조물이고 감성적으로 현존하면서 감성적인 영향을 받아서 악행을 저지른다. 그러므로 이 감성으로부터 벗어나서 영혼에 해당하는 신의 모상을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신학적 인간학의 견해이다. 니체는 이런 방식으로 스스로와 부정적으로 매개되는, 죄 지은 자로써 자신과 매개되는 매커니즘을 도덕의 발생학에서 폭로하고 있다.
- 철학적 인간학에서, 칸트의 철학이라는 것은 유한성의 철학이다. 유한성의 철학이란 인간 범위와 한계를 규정한다. 칸트 철학의 목적은 이성 능력의 범위와 한계, 이성 능력이 합법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범위와 넘어서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한계를 규정하는 것이었다. 니체가 보이고자 하는 것은 이런 인간 능력이 한계 규정이 임의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인간학적인 프로젝트 자체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니체의 초인이라는 개념 아래 깔려 있는 것이다. 니체의 초인 개념의 출현과 더불어 인간학이라는 학문이 종결되고, 인간 개념에 의존하지 않는 방식의 사상이 진행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방식의 인간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은 현대 철학의 기본적인 특징을 이루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은 반인간주의를 확실히 명시하고 있는 철학을 프랑스 철학에서 기대할 수 있지만, 그 이전에 이미 하이데거 철학의 기조가 반인간적이다. 하이데거는 여러 가지로 반인간주의를 표현하고 있다. 정신, 영혼 이성 등등은 어떤 방식으로 정리되어 있는지, 인간 개념 안에서, 이런 것들은 모호한 방식으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그의 개념, 그의 철학적인 개념인 현존재의 개념을 보자. 현존재라는 것은 바로 Dasein, 말로는 거기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 존재로부터 파악된 자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라는 것은 존재함 자체가 아니라, 존재함으로부터 출현한 존재자의 특질, 속성, 성질로써 파악된 것이 인간이다. 예를 들자면, 인격이라는 개념, 로마법의 바탕에 있는 인격 개념을 보자. 인격은 독립적이고 등등 우리는 인격의 함축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이것은 어떤 존재자의 속성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앞서는 것은 이 존재자의 존재함 자체의 차원에서의 사유가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어떤 존재자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 특질에 입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자의 존재함 자체 속에서 그 존재자를 파악하는 것이 하이데거의 현존재 개념이다.
이것은 인간 이전적인 차원에서 그렇다. 다른 방식의 반인간주의들도 목격할 수 있다. 들뢰즈의 작업 중 하나가 도덕의 발생학에 지대하게 영향을 받은 안티외디푸스의 작업이라는 것은, 바로 외디푸스 컴플렉스에 매개된 형태로 정체성을 얻게 된 욕망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외디푸스는 신 또는 아버지가 현대적으로 계승된 형태이다. 그래서 외디푸스를 통해서 인격은 아버지에게 죄의식을 가지고, 아버지를 증오하고, 금지된 대상으로써의 어머니를 향하는 한 가정 안에서 유아의 욕망으로써 정체성을 이룬다. 이런 것이 정신현상학에서 말하는 기본적인 차원에서의 기본적인 욕망이다. 반외디푸스라는 것은 외디푸스적으로 형성된 인격적인 욕망이라는 것을, 욕망이라는 것을 정상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의 바탕을 이루는 욕망을 일종의 억압의 소산으로 이해하고, 우리를 외디푸스적인 기제로부터 우리를 해방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욕망 이론에 있어서의 반인간주의라고 일컬을 수 있다. 이런 반인간주의적인 착상이라는 것, 계획이라는 것은 넓게 니체의 영향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초인 개념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니체의 핵심적인 개념들을 더 알아보자.
니체는 그렇게 특정한 임의적인 형태에 매개되지 않는 원초적인 존재함의 방식을 힘의 의지의 발견으로 이해했다. 인간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법칙을 넘어서서 힘의 의지를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 니체의 계획이다. 초인이라는 것은 인간을 넘어서서 힘의 의지를 구현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영원회귀
그런 초인을 통해서 구현되는 힘의 의지, 이런 힘의 의지가 원초적으로 구현 되었을 때, 이 전체를 지배하는 전체와 관련해서 이야기될 수 있는 법칙을 영원회귀라고 할 수 있다. 영원회귀는 쉽게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영원회귀가 아닌 것은 무엇인가? 어떤 정체성을 지닌 사물이 그대로 되돌아오는 것이 영원회귀가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죽은 사람이 되돌아오는 것, 사라진 시대가 되돌아 오는 것이 그 자체 모습대로 돌아오는 것이 영원회귀가 아니다. 영
원회귀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니체는 여러 가지 길을 제시한다. 가령, 에너지 항존의 원리를 예로 들고 있다. 경험과학에서 이야기하는 에너지 항존의 원리를 보자면, 에너지는 어떤 형태로든 사라지지 않고 계속 존재한다. 이것은 그것이 특정한 정체성을 가지지는 않더라도 되돌아오는 방식 가운데 하나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에너지 항존의 원리가 영원회귀의 이론을 구성한다고 이야기할 수 는 없다.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고 설명하기 위해 니체가 들고 있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영원회귀라는 것은 모든 것이 긍정되는 것이다.
긍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헤겔의 변증법에서 찾을 수 있다. 헤겔에서는 테제가 있고, 그와 대립되는 안티테제가 있다. 안티테제를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보고 극복하는 것이 헤겔에 있어서 변증법적인 전개 과정이다. 이 안티 테제를 극복하는 것을 해겔에서 "지양"이랴고 이야기한다. 지양은 배척하고 보존함, 또는 없애버리고 남겨둠. 이런 상반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 지양이다. 내 앞에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써 부정적인 나 자신이 있다. 이 때 대립하고 있는 나 자신을 완전히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이 지배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에게 저항하고 있는 자를 가공하고 흡수하는 것이다. 나에게 저항하고 있는 나 자신을 극복한다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룰 수 있는 자로써 흡수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극복해야 할 장애물을 없애버리면서 동시에 나에게 보존하는 것, 나 자신이 지배할 수있는 것으로 보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게 바로 지양의 의미이다. 이렇게 어떤 것을 배척하는 것이 지양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영원회귀는 이렇게 없애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긍정하는 것이다. 모든 것들이 주어졌을 때, A와~A의 대립관계를 만들어서 A가 ~A를 극복하고 A'로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모든 것들이 그 자체로 긍정되는 것,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게 바로 부정에 반대하는 영원회귀이다.
왜 긍정하는 것이 영원회귀인가? 부정되지 않고 계속 긍정되므로. 그것은 계속 항존하는 것, 계속 되돌아 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복수적인 것들이 A, B, C 등등이 A에 대해서 B, C가 ~A를 형성하지 않고, A는 A대로 B는 B대로, C는 C대로 긍정된다는 뜻이 무엇을 뜻하는가? 항들의 대립적인 관계가 아닌 항들 사이의 차이만이 긍정되는 것이다. 수많은 다수적인 것들이 부정적 관계를 형성하지 않고, 계속 다수적인 것으로 있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영원회귀이다. 영원회귀는 ABCDE..가 있다고 할 때, 이들을 통틀어서 다수적인 것, 다수성이라고 이야기해보자. 다수성이 그 자체로 긍정된 것이 영원회귀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다수성이 그 자체로 긍정된 것이. 그러니까 이것을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영원회귀 속에서는 힘의 의지가 그 자체로 긍정된다.
왜 그런가? 힘의 의지를 부정적으로 만드는 것이 니체가 비판했던 서구 문명 자체였다. 부정된 것은 내가 나 자신과 부정적 관계 속에서 만나는 국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는 나의 존재함, 나는 나의 욕망 자체를 부정적으로 대면한다. 이것은 다르게 이야기한다면, 나 자신의 존재, 욕망, 이런 항들을 부정적으로 매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정적으로 이야기해서 단죄하고 길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그 자체로 다수성 속에 있도록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나의 존재와 나의 욕망을 그 자체로 긍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테제와 안티테제라는 부정적인 관계 속에 들어서지 않는, 다수성이 계속된, 부정적인 명제로 종합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상태를 가리켜 영원회귀라고 일컫는다. 이런 모든 것은 그 자체로 계속된다, 반복된다. 그러므로 이런 모든 것은 그 자체로 반복된다는 것이 원리이니까, 우리는 영원회귀를 가리켜 다수적인 모든 존재자들의 원리로써의 존재라고 이야기해도 좋다. 모든 존재자, 다수적인 것을 지배하는 원리로써 우리는 영원회귀 = 반복 =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영원회귀를 들뢰즈는 니체에서 나오는 주사위던지기를 통해서 개념화하기도 한다. 두 번의 긍정이 있습니다. 부정의 부정이 아니라 긍정의 긍정이라는 두 번의 긍정이다. 주사위 던지기에서의 긍정은 던질 때의 긍정이 있다.
- 던질 때의 긍정은 헤겔의 변증법에서 A가 나의 위치라면, 이 법칙에 합당한 수는 ~A이다. 그러나 영원회귀는 다수성 자체의 긍정이라면 1~6까지의 모든 수가 긍정된다. 어떤 것이 나오든 영원회귀에 부합하는 것이다. 변증법적 과정에서는 A가 있다면 ~A가 나와야 한다. 영원회귀에서는 모든 항들이 긍정 자체가 영원회귀의 법칙 자체이므로 1~6까지의 어떤 것이 나오던 그것은 영원회귀에 부합하는 수이다. 이렇게 첫 번째 긍정은 다수성 자체에 대한 긍정이다.
- 두 번째 긍정은 주사위가 땅에 떨어질 때의 긍정이다. 떨어질 때의 긍정은 이런 다수성을 생산해내는 법칙 자체, 모든 다수적인 것 자체가 반복되는 것이 법칙이다, 존재다, 아르케이다, 원리다라고 긍정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다수성에 대한 긍정, 두 번째는 다수성을 산출하는 것 자체가 법칙적 지위를 지닌다라는 것, 존재자라는 지위를 가진다는 것이 긍정이다.
chaosmose
그래서 더 나아가서, 이런 영원회귀를 급진적으로 해석하자면, 모든 다수적인 것들이 출현하는 것, 그 원리는 결국 혼돈 자체이다. 카오스 자체가 아르케가 되는 것이다. 카오스 자체가 원리이니까 이것을 들뢰즈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chaosmose가 되는 것이다. 즉, 카오스가 코스모스, 즉 조화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카오스, 어떤 수가 나오던 그 수는 법칙에 의해서 긍정된다. 법칙이니까 카오스는 결국 코스모스의 지위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주석으로 소개했다.
그렇다면 이제 영원회귀와 관련해서, 하나의 심각한 주제를 보자. 영원회귀는 그럼 모든 것이 긍정된다면, 역사상에 출현해서는 안 되는 것, 악한 것, 폭군, 학살 등도 영원회귀하는 것일까? 영원회귀는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이고 모두 돌아오게 하는 것인가? 그런 것에 대해서, 니체는 영원회귀를 마련해 줄 윤리적 시금석을 제시한다. 말년의 단편에서, "만일 이것이 회귀되어도 좋은 것인가라고 너에게 묻고서 모든 것을 시작한다면 이것은 너의 가장 확실한 무게 중심이 될 것이다." 일종의 윤리적 시금석으로써, 회귀되어야 할 것과 되어야 하지 않을 것을 가르는 그런 윤리적 선택이라는 것이 영원회귀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폭군, 학살, 전쟁은 되돌아와도 좋은가라고 묻고 시작한다면 이것은 확실한 무게중심이 될 것이다. 이런 윤리적인 선택이 영원회귀의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니체의 이런 직접적으로는 헤겔로 대표되는 독일 관념론에 반대하고, 넓게는 플라톤, 기독교 등등에 대한 니체의 극심한 비판으로 인해서 얻게 되는 니체의 새로운 개념들, 힘에의 의지, 초월, 영원회귀론을 염두에 두자. 독일 관녈몬, 멀리는 플라톤, 기독교 등등에 대한 비판의 소산인 니체의 성찰들은 현대 철학에도 계속해서 영감을 불어넣는다.
신칸트학파
이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펼쳐지는 신칸트학파 운동에 대해서 다루자. 신칸트학파의 핵심적인 정신을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1865년에 오토 리프만이라는 학자가 칸트와 추종자들이라는 책을 냈는데, 거기에 "칸트로 돌아가라"라는 모토를 제시한다. 돌아가라라는 것은 크고 작게 일어나는 일이다.
배경
다시 독일 관념론을 보자면, 칸트에 대한 반발로부터 시작해서 물자체를 인식할 수 없는 것으로 남겨놓은 이상 전체를 해명해 내는 것으로써의 철학은 불가능하다라는 그런 성찰 속에서 독일 관념론이 전개되어 왔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란, 극도로 발전한, 또는 급진적이게 된 사변 철학이었다. 대상 세계, 물질적인 세계조차도 이성의 활동으로부터 연역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급진화된 형이상학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지경이 되면 사람들은 반대편에서 칸트 철학의 건전성을 상기하게 된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전성이라고 해도 좋다. 나는 저 대상을 신이 아닌 이상, 생산해낼 수 없다. 내가 생산해낼 수 없는 대상과 유한한 주체라는 두 항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칸트 철학의 건전성. 이것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이다. 독일 관념론에 대한 반발로써 칸트로 회귀하자는 신칸트주의의 운동이 생겨났다. 관념론적인 형이상학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것이 최종적으로 극대화되었을 때는 극히 의심스러운, 사변적인 고안물로 평가, 비판된다. 일종의 형이상학적 방종이 출현하는 것이고, 그럴 때마다 이성의 범위와 한계를 규정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반발이 일어난다. 이런 것을 신칸트주의 운동이라고 한다.
운동?
이 말 뜻을 해명해보자. 칸트 정신의 회복 속에서 철학을 진행하자. 운동이라는 것은, 우리는 독일 관념론에 대해서도 운동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20세기 현상학에 대해서도 운동이라고 표현한다. 이런 것은 하나의 경향성, 방향성은 가지되, 그 안에서 하나로 묶을 수 없는 사상들이 난립한다는 뜻이다. 하나의 스승 아래서 학파를 구성하는 구조가 아니다. 낱낱의 개별적인 사상가들이 출현하는 것이 운동의 본성이다. 독일 관념론 안에서도 전체를 설명하기 위한 사변적인 형이상학이라는 방향을 목격하면서도, 피히테, 셸링, 헤겔이 모두 개별적인 철학자라는 것을 보았다. 현상학적 운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모두 다 환원할 수 없는 별개의 개별성을 가진다. 큰 방향성만을 가리키기 위해서 운동이라는 표현을 쓴다.
또 하나, 미리 이야기하자면, 신칸트주의는 20세기 초반까지 진행되었다고 하지만, 현대의 대표적인 철학이라고는 절대 평가할 수 없다. 신칸트주의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하이데거의 존재론이라거나 현상학 등등 새로운 철학적 경향이 현대의 주도적인 흐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한계를 염두에 두고 신칸트주의를 공부하자.
구성
신칸트주의는 크게 마르부르크 학파와 바덴 학파로 나뉜다. 마르부르크 학파는 주로 논리학적, 인식론적, 방법론적 문제들에 전념했다. 바덴 학파는 가치 문제에 집중했다. 칸트의 이론 철학적 경향을 계승한 것이 마르부르크 학파, 실천적인 경향을 계승한 것이 바덴 학파라고 할 수 있다.
마르부르크 학파의 대표자는 헤르만 코헨, 파울 나토로프라고 할 수 있다. 바덴 학파의 대표자는 빈델반트이다. 빈델반트의 후임으로 오게 되는 하인리히 리케르트도 있다. 리케르트는 신칸트주의자라고는 하기 어렵다. 그러나 빈델반트와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는 여기서 다루는 것이 좋겠다.
마르부르크
코헨은 철학의 체계라는 방대한 작품을 내놓는다. 코헨은 이론적인 작업을, 마르부르크 학파는 이론적인 작업에 전념했다고 했다. 이런 것은 칸트 해석에서 어떤 특징적인 면모를 가지는가 하면, 사변철학에서 이론적인 면은 분석론이 담당하고, 이론적인 것으로 환원 안 되는 고유 영영으로써 감성이 있었다. 그런데 마르부르크 학파의 이론적인 접근에서 특징적인 점은 칸트의 감성 이론, 즉 초월적 감성론을 버리고 순수 사유, 순수 이식을 가능하게 해 주는 논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마르부르크 - 코헨
구체적으로, 수학과 물리학의 바탕을 이루는 선험적인 순수 인식의 논리학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작업을 코헨은 진행했다. 두 번째 권, 철학의 체계에의 두 번째 권에서는 순수 의지의 윤리학을 다룬다.여기서는 윤리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고, 사회철학적인 문제도 다룬다. 여기서는 윤리적인 차원에서 국가를 인간의 윤리적인 의식의 구체화된 산물로 이해하고 있다. 두 번재 권은 요약하자면 윤리적인 차원에서 인간 의지를다룬다. 세 번째 권에서는 통일이라는 관점에서,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의 통일이라는 관점에서, 문화적 의식을 다루고 있고, 통일을 이루는 것으로써 미학의 문제를 조명하고 있다 크게 보자면, 이론 철학, 실천 철학, 판단력 비판에서 양자의 통일이라는 칸트의 프로그램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지금 이야기한 것과 관련해서 핵심적인 것은 첫 번재 권에서 논리학적인 작업을 어떻게 코헨이 관심을 가지고 수행했는지이다.
마르부르크 - 나토로프
나토로프는 코헨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정밀 과학의 철학적 기초같은 것이 대표작이다. 수학이 성립하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직관 형식에 의존할 수 없다는 것, 논리로써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도 코헨에서 확인했었던 것과 같은 감성론은 소홀히 하는 면모를 보이고 있다. 칸트에서는 수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직관이 필수였다. 칸트에 있어서는 철학적 인식은 개념을 통한 인식이고, 수학적 인식은 개념의 구성을 통한 인식이라고 나누었다. 개념의 구성이라는 것은 순수 직관에서 이루어진다. 두 점을 직관중에 제시해보고서만 최단거리를 알 수 있다. 이 직관이라는 것은 순수 공간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런 직관이 수학을 가능하게 하기에 필요 없다고, 오직 논리적인 기초만을 가진다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코헨과 나토로프가 궁극적으로 칸트를 쇄신하면서 추구한 것은 물자체라는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물자체를 극복한다는 것은 사유와 존재, 사유는 유한한 인간 이성을 뜻하고, 존재라는 것은 물자체를 뜻하는 것이다. 사유와 존재의 이원론을 극복하는 것이 이들의 칸트 계승의 목표였다. 나트로프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양자, 곧 사유와 존재는 부단한 상호관계에서만 존재하고, 또 의미를 갖는다." 부단한 상호관계라는 것은 사유가 끊임없이 존재를 규정하는 과정을 뜻한다. 그러니까 결국 정신의 과정이라는 것은 사유가 존재를 계속해서 규정함으로써 존재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유의 부단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나트로프와 코헨의 작업을 비판적으로 평가해보자면, 칸트를 져버리지 않고는, 칸트를 버리고서 사변적 형이상학으로 나아가지 않는 이상은 사유가 존재를 완벽히 규정하는 일은 성취될 수가 없다.
바덴
이제 바덴 학파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바덴 학파는 가치의 문제에 중점을 두고 연구했다. 가치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문화 과학이라고 불리는 자연 과학으로 환원되지 않는, 즉 오늘날의 관점에서 인문학이라고 일컬어도 좋은 그런 영역의 독자성에 대한 강조라고 할 수 있다.
바덴 - 빈델반트
빈델반트는 모든 기술적인 명제, descriptive한 명제는 도덕적인 명제 뿐 아니라 자연과학적 명제, 논리적인 명제같은 것들도 분명히 가치론적인 기반을 가진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벤델반트의 가치론에서 핵심적이다. 가령, 윤리학적인 명제가 가치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미와 관련해서도, 이것은 아름답다, 추하다는 판단의 바탕에는 가치가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자연과학적 명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연과학적 명제를 개연성이 높고 완전히 보편적인 것이 아님에도 그것을 받아들인다. 왜 받아들이는가? 그게 그런 방식으로 설명되어야지만 자연 전체의 정합성이 보증되기 때문에. 이런 정합성이라는 가치가 끼어들게 된다. 이것은 논리적인 규범에서도 그렇다. 논리적인 규범은 자동적으로 작동되는 것 같지만, 논리학적인 규범에 따라야 하는 이유는 그 바탕에 옳은 것이 좋다는 가치가 바탕해 있기 때문이다.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이라는 규범에 따라서 사유해야 한다. 왜 그런가? 하고 반론한다면 그것은 논리의 법칙 내부에서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치가 해답을 좌우한다. 옳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가치가 바탕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논리나 자연과학적 법칙의 배후에 있는 진리를, 그것들이 논리나 자연과학이 쫓고 있는 가치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나아가서 논리나 수학적 명제의 배후에서 미적인 가치 역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미적인 가치는 수학이나 논리적인 해법에 있어서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아름다움이라는 미적 가치를 배경에 두고서 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빈델반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론적인 성찰 역시 바탕에는 그 최종 신급으로써 가치를 둘 수밖에 없고, 따라서 가치의 연구가 궁극적인 연구이다.
더 나아가서, 빈델반트는 미적 가치라거나 진리의 참됨이라는 가치라거나 도덕적 가치 이런 것이 낱낱의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가치의 부분들이라면, 우리는 이 모든 가치들을 정초하는 통일적인 바탕을 생각해야 하는데, 통일적인 바탕을 빈델반트는 신에서 찾았다. "우리는 거룩한 것을 참된 것, 좋은 것, 아름다운 것과 같이 보편적 가치의 특수한 종류로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초감각적 실재와의 관계에 있는 한 이 모든 보편적 가치 자체라고 이야기한다"라고 이야기한다. 정리해서, 거룩한 것은 신이다. 이것은 좋은 것, 참된 것과 같은 개별적 가치의 한 영역을 이루지 않는다. 이 모든 가치를 통일해 주는 바탕이 거룩한 것, 즉 신이다.
가치는 어디서 오는가? 논리의 법칙, 진리의 법칙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그런 것들을 정초시켜 주는 것이 가치라면, 도대체 가치는 무엇에게 정초되는가? 왜 가치는 가치인가? 그것을 탐구할 때, 빈델반트는 신이라는 신급이외에는 가치의 근거로써 제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바덴 - 리케르트
이제 빈델반트에 이어서, 리케르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자. 리케르트는 하나의 중요한 학문적인 구분을 하게 된다. 정신과학이라는 부분이다. 구체적으로 리케르트가 구분하고 있던 것은 자연과학과 역사학을 구분한다.
자연과학과 역사학을 구분할 때, 궁극적으로 가치라는 문제가 개입하고 있다.
- 자연과학은 역사학같은 정신과학, 인문학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다. 자연 과학은 보편적인 법칙을 추구하며, 이런 보편적인 법칙의 예화로써만 개별적인 사태, 개별적인 것들에 관심을 가진다. 자연 안에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은 오로지 보편적인 자연 법칙의 예로써만 의미를 지닌다.
- 역사학이라는 것은 역사 안에 나타나는 사태들은 모두 개별적인 사태들이다. 단일한 것, 독자적인 것이다. 이렇게 역사학은 보편 법칙의 예화로써 개별적인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들을 그 자체로 독자적인 것으로 다룬다. 어떻게 역사학은 자신의 학문의 대상을 가지게 되는가? 세상의 모든 것은 독자적이고 개별적이지 않은가? 바로 역사가가 이 개별적인 것에 접근할 때는 가치의 관점에서 한다. 가치의 관점에서 이 사건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하다로 평가한다. 이렇게 가치의 관점에서 평가할 수 없다면, 역사학은 일어난 일 모두를 자기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고,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자연과학과 역사학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가치의 근본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리케르트를 통해서 구분된 학문의 근본적인 차이, 학문의 방식이나 본성에 있어서의 차이,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을 가르는 이런 차이라는 것은 이후 딜타이같은 학자에 있어서 더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그리고 딜타이는 해석학의 선구자로 다루어진다.
실용주의 : 한스 파이힌거
이렇게 신칸트주의의 핵심을 이루는 마르부르크 학파와 바덴 학파를 살펴보았다. 추가적으로, 관련된 다른 경향을 추가해 볼 수 있다. 실용주의적 경향이다. 실용주의적인 경향을 보여 주는 철학자, 대표적인 철학자는 한스 파이힌거이다. 한스 파이힌거는 칸트의 이론 중에 as if, 마치 ~처럼, als ob(독일어)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을 토대로 부각시키고 있는 한스 파이힌거의 저작 자체가 also, ~처럼의 철학이다. 칸트에서 as if는 자연의 목적성이라던가 자연의 전체성은 이성의 이념을 통한 사유의 대상일 뿐이지, 인식의 대상은 아니었다. 오로지 감성에 소여된 것만이 인식의 대상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성은 이념을 가지고, 마치 자연 현상이 전체를 이루는 것처럼, 마치 목적을 향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사유한다. 그러니까 이성이 사유하는 방식 자체라 as if이다.
한스는 as if라는 사유가 어떻게 동기지어져 있는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실용주의적 차원에서 as if라는 사유가 마련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예를 들어서, 자연과학의 이론은 대부분 개연성이 높은 가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정 정도의 실험을 거치고 나면 참된 것처럼 받아들인다. 왜 그런가? 자연과학적 법칙을 전제하고서 세상을 파악하고 인식하려고 할 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적 법칙이 완벽하게 진리로써 생각한다. 바로 그런 식으로 진리인 것처럼 생각할 때, 세상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단지 자연과학이 문제가 아니라, 종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종교적 교리가 참된 것처럼 받아들인다. 하지만 일반인들도 신학자들도 그것이 참된 것이라고 확정짓기는 힘들다. 이것은 논쟁의 대상이지, 그 진리가 확실히 정초되어서 이야기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것이 참된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이다. 그렇게 했을 때, 우리 삶에 가져오는 이익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실용적인 관점에서 참된 것 처럼, ~인 것 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런 것들도 마치 참된 것처럼 받아들이고 사람은 실천에 옮긴다. 보다 더 많은 이익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신칸트주의에서의 실용주의적인 경향의 한 측면이다.
신칸트주의와 더불어서, 여러 입장들을 살펴보았다.
카시러 : 상징 형식
신칸트운동과 관련해서, 주요하게 이런 입장으로 환원되지 않는 철학자가 있다. 바로 카시러이다.
카시러(1874~1945)
카시러의 대표작은 상징 형식의 철학이다. 대규모의 상징 형식의 철학이다. 카시러는 인간과 동물을 구별해 주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상징을 활용할 수 있다라는 사실에서 발견한다. 상징이라는 것은 수학적 기호를 활용하는 것도, 미술에서 도상, 아이콘을 활용하는 것도 상징이다. 이렇게 상징을 이용하는 것이 인간과 동물을 구별짓는 요소이다.
인격
이런 차원에서 인격의 정체 역시 말한다. 상이한 상징적 활동들을 결합하는 기능이 인격이다. 이렇게 상징활동을 통해서 인간, 인격을 해명한다. 인간은 단지 사유하는 이성적 동물보다는 보다 구체적으로는 상징을 다룰 수 있는 상징 활동을 하는 동물이고, 상징 활동에 속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수학 기호를 활용하는 것, 더 넓게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 신화를 공유하는 것 모두 상징 활동이다. 그리고 이 상징 활동을 하는 인간의 소산이 문화이다.
문화/하이데거의 비판
그래서 카시러에게서는 문화라는 개념이 중요한 것으로 나타난다. 나중에 카시러의 주장, 신칸트학파의 입장이라는 것은 하이데거에서 격렬하게 비판된다. 상징 활동 자체가 문화를 구성하고, 상징 활동을 하는 인간의 소산이 문화라고 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문화적 동물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논점은 문화 개념에 대한 비판이다. 문화라는 것은 근본적인 개념이 될 수 없다. 철학은 존재론이라고 했을 때, 말 그대로 존재를 탐구한다. 존재가 그 학문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자들이 출현하지만, 그 존재자들의 존재함은 무엇인가? 라고 물을 수 있다. 이렇게 철학을 존재론이라고 했을 때, 철학의 근본 관심은 존재적, 이 존재에 대한 관심에 대해서, 문화라는 주제가 더 우위에 올 수 있는가? 대학 학제를 보면 가끔 의문을 표현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 문화별로 학제를 나누는 것이다. 미국, 유럽 문화, 등. 문화적으로 나누었다고 한다면, 이 안에서 철학도 나누어진다. 유럽철학, 영미철학, 독일철학 등. 그렇다면 이것은 다르게 이야기하면 문화에 의해서 철학을 규정하는 것이 된다. 철학 자체를 문화의 소산으로 보는 것이다. 상징활동을 해서 문화를 창출하는 인간의 활동이 바로 철학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의문을 가져보자. 이런 문화라는 뜻에 대해서 존재라는 개념은 문화에 종속된 것일까? 문화라는 주제 안에서 생각되는 것일까? 오히려 거꾸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문화의 존재함이란 무엇일까? 도대체 존재함의 근본적인 의미가 무엇이길래 문화라는 존재자가 출현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식으로 우리는 존재 물음에 대해서 문화를 이차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의 문화 활동의 일부로써 철학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두 가지 관점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문화가 앞서는 것인가 철학이 앞서는 것인가. 철학 자체의 내부에서 생각해보자면, 근본 개념인 존재 이상의 것이 있을 수가 없고, 그러므로 그 외에 존재자들의 특성으로 부여받은 인간적 성격, 그리고 인간적 성격에 입각해서 수행되는 문화라는 것은 이차적일 수밖에 없다. 근본 개념이 아니라. 이렇게 보자면, 철학의 입장에서, 문화 철학이라는 것은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면모를 신칸트주의, 특히 카시러를 통해서 부각되는데, 이 문화 개념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어떤 선입견 없이 근본 개념, 존재라는 개념에 접근해야 하는데, 문화는 문화 활동을 하는 인간을 전제하고, 인간의 특별한 성질로써 상징 활동을 전제하고 있다. 존재자들의 이런저런 성격을 전제하는 한에서만 문화철학이라는 개념은 성립할 수 있다. 그리고 문화라는 개념은 총체적으로 문화 자체를 가능하게 한 문화의 존재함이라는 것, 존재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딜타이 - 정신과학
이제 빌헬름 딜타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신칸트주의로 우리가 제한한다면, 지금 이야기한 철학자들, 그리고 리케르트들은 속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신칸트주의자가 학파가 아니라 운동이기 때문에, 명확히 테두리지을 필요도 없고, 지을 수도 없다.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주제의 연관성 속에서 딜타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딜타이 역시 신칸트주의자로 간주되는 철학자가 아니지만 주제와 더불어서 이야기를 해야함 한다. 딜타이에게서 기본적인 것은 자연과학과 대비되는 정신과학이라는 것, 내용적으로는 오늘날의 인문학, 역사학에 속하는 것이다. 이것을 구분하는 것이 기본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정신과학이라는 것은 특별한 범주들을 통해서 인식을 구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범주라는 개념을 도입한다는 차원에서, 칸트의 지대한 영향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범주라는 것은 칸트에서처럼 논리적으로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딜타이에게 있어서 범주의 지위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기본적인 것을 전제로 해서, 딜타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정신과학, 문화과학, 자연과학과 구분되는, 문화과학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정신과학의 대표적인 것은 바로 역사적인 연구이다. 역사적인 연구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가? 자연과학의 특성은 개인적인 선입견을 제외하고, 객관적인 시선, 중립적인 관찰자의 입장을 가진다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객관적인 시선, 중립적인 시선을 확보하는 것이 핵심적이다. 역사학에서도 그런가? 역사학은 오히려 주관적인 출발점을 가진다. 역사학은 바로 체험이라는 그런 주관적인 시발점을 가진다. 역사가가 역사에 접근하는 것을 보자. 역사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는 것을 통칭해서 역사적인 표현이라고 일컫는다. 역사적인 표현이란 범위가 대단히 넓다. 문서, 문헌, 그리고 폐허가 된 옛 성터, 유적지 등이 모두 역사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로마 시대의 문헌을 살펴보면서, 공포가 만연한 시대였다라고 평가한다고 해 보자. 그러면 이 로마 시대의 제도를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 보지 않고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사람들을 고문하고, 쉽게 사형하고, 이런 것들. 이런 것들은 공포스러운 일이다라는 것을 내 체험에 비추어 보지 않고는 인지할 수 없다. 공화정은 독재 정치보다 좋은 것이다라고 평가한다고 해 보자. 이것은 민주주의적인 삶을 체험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역사학이라는 것은 그러므로 자신의 연구 대상 바깥에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서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에 입각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 체험에 입각해서 역사적 표현물들을 해석하는 것이 정신과학의 한 종류로써 역사학에서 근본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